발뺌하는 고문 경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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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명의 피고인들은 서로 죄를 떠넘기기에 바빴고 그때마다 방청석에서는 고함과 야유와 욕설이 뒤범벅 됐다.
국가 공권력을 대표한다는 검찰도 실체적 진실 발견에는 별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재판부도 구속 만기에 쫓긴 탓인지 재판을 서둘러 진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짙은 감청색 수의차림에 기어드는 목소리의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헝클어진 머리에 납빛 얼굴이었고 이마에서는 진땀이 번들거렸다.
검사의 직접 신문에 첫 번 째로 나선 조한경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대부분 부인, 검찰을 당황하게 했다.
박 군 사망 당시 현장에도 없었고 고문 행위에 가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이크를 쥔 조 피고인의 두 손이 시종 심하게 떨리는 것이 1O여m 떨어진 기자석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그러나 추가 구속된 황정웅·반금곤 피고인의 진술은 조 피고인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모든 게 조 경위의 지시였고 조 경위는 다른 방에 간 적이 없으며 분명히 현장에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 을 저지른 피고인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서로 발뺌했다.
상사는 부하가 죽였다고 하고 부하는 상사에게 미루었다. 다급해지자 조 경위는 『유정방경정이 구치소로 찾아와 「불어봐야 2대3이니 그냥 덮어쓰라」 고 협박과 회유를 했었다』 고 털어 놓기도 했다.
대체로 1차로 구속된 조 경위와 강진규 경사, 추가 구속된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경장의 진술이 2대2로 일치했고 이정호 경장은 독자노선이었다. 변호인들은 황경위·반경장의 진술이 너무 매끄러워 입을 완전히 맞춘 느낌이 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검사들도 박 군이 피의자였는지, 참고인이었는지 조차 묻지를 않았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게 두렵다는 표정이었다.
전기고문 여부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또 박 군사건 이전의 조사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을 법한데 한번도 추궁하지 않았다. 다른 사건처럼 「추상」 같다는 느낌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내 아들을 살러내라.』
방청석 앞자리에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박 군 어머니는 피고인 석으로 달려가다 끝내 실신, 업혀나갔다.
분노의 고함과 욕설·절규가 뒤범벅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첫 공판. 결국 명쾌한 「진상규명」 보다 북새통 속에서 끝나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한 피고인들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다음 공판도 별로 기대할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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