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잃었는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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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9면

어떤 수도자가 오랜 수련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을 듣고 수도자가 머무는 수도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많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수도자에게 물었다.


“그래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수도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셀 수 없이 많이 잃었소.” 수도자의 대답에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다. “괜히 잘난 체하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주시오. 얻은 게 없고 도리어 잃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허허, 참. 그러면 내가 잃은 걸 얘기해 보겠소. 나는 무지와 환영, 모든 욕망을 잃었소. 또 나는 불행·무의미·절망·분노·비난·탐욕·정욕·시기·질투 이런 것들을 잃었소. 나는 가난하오. 당신들은 아직 부자지만. 이것이 내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선물이오.”


허태수 목사의 설교집 『자기 포기』에 나오는 심오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소중하게 여기는 깨달음에 대해서 오해한다. 깨달음은 무언가 ‘얻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수도자는 깨달음에 대해 ‘얻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나는 것일까. 수도자가 갈파한 것처럼 우리의 무지와 환영, 욕망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처럼 종교도 신이 아니라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기독교인은 드물다. 무언가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삶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때문에, 비움이나 버림이라는 종교적 미덕에 쓸 에너지가 없다.


신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는데, 덜어냄의 미덕을 멀리해온 종교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의에 대한 발언권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해 당당하게 비판할 만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가 묻는다면, 누가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중세 수도승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했다. “거장은 목재로 조상(彫像)을 만들 때 나무에다 상을 새겨 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상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깎아 냅니다.”(매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조각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우리 삶을 살리는 이치가 욕망의 깎아냄에 있다는 것. 깨달음을 얻은 수도자의 말처럼 얻음이 아니라 잃음에 있다는 것. 종교인의 명찰을 가슴에 착용하고도 깎아냄이나 덜어냄이나 잃음의 가치를 모른다면, 아직 깨달음에서 멀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감추어진 것이 환히 빛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얻음이 아니라 잃음의 가치에 눈뜰 때, 낙원의 문은 열리는 것이 아닐까.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우리 모두 눈을 감고 내면에 울려오는 음성을 들어보자. 너는 올해 무엇을 잃었는가?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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