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 필요한 건 어쩌면 어른일지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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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32면


당신이 평생 읽은 책을 순서대로 꽂아놓은 책장이 있다면 그 맨 앞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을, 하지만 그 후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였을 그 책들, 그림책.


이 책을 쓴 네 명의 저자는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그 책장을 뒤져보다 그림책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되었노라 말한다. 시인·일간지 기자·출판 평론가·동화 작가 등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삶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피난처로 그림책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의기투합한 이들은 이런 결심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처럼 그림책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게 만들자. 우리처럼 그림책 덕분에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게 만들어 버리자.”


저자들은 ‘그림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민망해진 어른들에게 “이 책 한 번 읽어보겠어?”라며 마흔 네 권의 그림책을 다정하게 들이민다. 세상에 온갖 책이 차고 넘치는 데 어른들까지 그림책을 읽어야 할 이유? 물론 있다. 어쩌면 어른이니까 더더욱.


세상은 복잡하고 판단은 쉽지 않다. 불안은 계속되고, 관계는 상처로 이어진다. 그럴 땐 그림책 속 단순하고 어여쁘고, 평화롭고 선한 세상에서 해답을 찾아보는 게 방법일 수 있다.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아름다운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위로가 찾아올 게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건 과거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주인공 어린이와 동물, 식물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기쁘고 소중한 날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쓰고 일론 비클란드가 그림을 그린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를 읽다 보면, 어떤 것을 처음 배우던 순간 느낀 그 충만하던 기쁨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읽은 모든 책을 모아 놓은 도서관을 소재로 한 『심야 이동도서관』(오드리 니페네거 글·그림)은 상상의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던 순수한 몰입의 순간을 되살린다.


각박한 일상을 살다 보니 잊어버린 인생의 작은 지혜도 그 속에 있다.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법,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법, 나의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는 법 등이다. 한국작가 노인경의 『고슴도치X』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과 맞서는 법을 유쾌하게 알려준다. 힘들게 꼬마 배추에서 작은 배추까지 자랐지만, 결국 버려지고 만 배추 이야기 『작은 배추』(구도 나오코 글, 호테하마 다카시 그림)를 소개하며 저자는 외로운 이들을 이렇게 격려한다. “저 매서운 눈보라를 견디고 있을 작은 배추가 안쓰럽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눈 쌓인 감나무 가지에 몇 송이 빨간 홍시가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만 힘들게, 혼자 힘들게 버티는 것 같지만 둘러보면 어딘가에 뜻밖의 동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보는’ 재미가 있다. 앤서니 브라운, 다시마 세이조, 로라 바카로 시거 등 그림책에 익숙치 않은 독자라면 낯설게 느껴질 거장들이 펼쳐놓는 장면 장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런 그림책만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켜 정성들여 찍은 책 속의 사진들은 그림책 자체의 물성이 갖는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그에 비례해 늙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는 순간이 많다. 이제는 노화를 시작한 몸속에 숨죽이며 남아있던 어린 날의 기억과 상처가 느닷없이 되살아나 현재를 망쳐놓기도 한다. “그럴 때 동화책을 펼치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뒤늦게 그림책을 만나 어린 날의 자신을 똑바로 마주함으로써, 그 시절 해소되지 못한 숱한 아쉬움과 슬픔들을 털어낼 수 있었노라 고백하며.


책 중간 중간 저자들이 소개하는 그림책 즐기는 팁을 참고할 만 하다. 좋은 그림책을 어떻게 고르고, 누구와 함께 즐기면 되는지, 그림과 글 사이의 넉넉한 여백은 어떻게 음미하면 좋은지 등이다. ‘내 편이 필요할 때’ ‘이제 그만!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 ‘혼자서 술 한잔할 때’ 등 그림책이 필요한 순간, 어울리는 책을 소개한 상황별 처방전도 그림책 초보 어른들에겐 아주 유용하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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