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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민족생활사 백두산(30)황석영|여명 <제1장> 하늘과 대지(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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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줄거리>
아직 낙후된 지역이었던 난하(난하) 북부지역에서는 아직도 마을연합의 원시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청구족의 변방에서 작은 연합체 수장의 아들로 태어난 덕이는 유목부족 동호에 의하여 고향의 터전과 가족들을 잃는다. 그리고는 예에 팔려가 하호 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변화를 체험한다. 그는 전공에 의하여 직업 전사로서 성장하게 되고 군벌의 모반을 도와준 댓가로 자립할 기반을 마련하여 하호 전사들과 그 식솔들을 이끌고 청구 지역으로 되돌아 온다.
난하를 사이에 둔 밝 종족의 여러 부족들은 제각기 인접한 지역의 부족들끼리 자연스런 부족연맹을 이루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찌기 예와 맥의 연맹이 있었으며 까마득한 옛날부터 밝 종족의 전통적 통치권을 승계하여 왔다고 자처하던 조선족 내부에도 변화가 일어나 한배를 주축으로한 청년 전사 집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배와 무장 우는 청년 전사 집단을 지휘하여 비장에서 그치지 않고 대읍을 포위하고 모든 큰한 중의검(왕)이라 자칭한 단웅을 위협한다.
그는 아직은 검의 자리를 찬탈하지는 않고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단군이 전신시 이래의 통수권을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십 사년 간의 섭정 기간을 거쳐서 단군으로 전혀 다른 통치 조직을 이루어 고조선을 건국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이 기간 동안에 부족연맹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알 수가 있다. 즉 강한 부족의 요구에 의하여 대읍에 읍이 종속되는 형식의 부족연맹이 이루어졌다.
한배는 섭정이 되자마자 우선 인근의 고죽족과 청구족의 읍에 쳐들어가 호족들을 억누르고 장로회의를 무시하여 새로 큰한을 뽑아두고 조선의 선비군을 체류시키는 방법으로 연맹을 이루어 나갔다.
덕이는 처가 마을이 있던 북방 유목부족과의 접경지인 말모루에 돌아가 애터(신개지)를 이루고, 각 마을연합에서 장로회의를 부활 시키며 군사와 군량을 모아 눈의 가시 같던 동호의 거류지들을 정벌, 평정해 나간다. 그때에 그를 돕게 되었던 것은 청구의 대읍이 조선에 복속될제 달아난 호족으로 설과 홀이 부자가 있었다. 청구군은 급습과 매복 작전과 화공을 적절히 구사하여 동호의 거류지를 점령한다.
여기서 덕이는 많은 군마와 가축, 그리고 잡다하게 사방에서 붙잡혀 와 있던 밝 종족의 여러부족 사람들을 얻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점령지 안에 있는 구리의 산도 얻게 되고 나아가 인근의 약소부족인 유족·발족과 연맹을 이룬다. 또한 덕이는 장가를 들자마자 난리를 당하여 동호에 잡혀가 있던 아내 아름이와 동생들을 되찾아 온다. 애터에 돌아온 덕이는 명실공히 동호의 정복자이며 유족과 발족의 보호자로서 진정한 청구의 실력자가 되어 큰한의 자리에 오른다.
덕이는 큰한이 되고 유와 발의 부족장들도 각각 한으로 지목 되었으며 동호의 정복지에는 예 땅에서 부터 덕이를 도와왔던 직업전사 출신의 검바우가 지목되었고 변방의 동북 지역에는 덕이의 처남으로 청구의 토착 전사 집단을 통솔할 수 있는 온수리가 한으로 정하여졌다.따라서 오한이 정해지고 그 가운데 큰한인 덕이가 있는 셈이 되었다. 중앙 대읍 애터에서 관료와 통치 계층이 정해지는데 청구의 호족 출신 설이 상 겸 박사를 맡았고, 유족 사람 다루가 상을 맡았으며, 우가·마가·구가·저가·양가의 오가는 각 지역 스물 한 사람의 수장들 가운데서 뽑았다. 덕이의 장인인 해누리는 연로 했으므로 화백모임에서 장로들의 의견을 모으는 선인이 되었으며, 상겸 박사인 설의 아들 홀은 중앙대읍에서 큰한 덕이의 친위군의통솔을 맡는 비장이 되었다.
일단 청구에 새로운 세력이 자리를 잡게되자 이들은 먼저 남쪽에 있는 청구의 대읍에 쳐들어와 검 단웅의 질서에 복속시켰던 조선족의 세력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청구쪽에서 볼 때에 올바로 승계된 큰한을 화백모임의 동의 없이 갈아치운 처사는 잘못된 것이었고 대의명분으로 볼 때에도 이는 분명히 청구족 내부의 문제였다.
덕이는 군사를 일으켜 구 청구의 대읍으로 쳐들어갔다. 대읍에는 허수아비 같은 큰한과 조선족에 무릎을 끓은 호족들이 있었으며, 이를테면 조선족의 점령군 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조선군 청구 비장이 읍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작은 내성만을 남기고 외성의 안쪽은 모두 점령이 되었다. 청구의 기병들은 저항하던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서 외성의 광장에 모아 두었고 보병들은 외성안에 사는 민가를 샅샅이 뒤져서 호족들의 식구들을 따로 골라냈다.
대읍의 큰한과 관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족 비장은 수백명의 군사들과 함께 외성 안에 지어진 큰한의 곽에 들어가 두꺼운 통나무 문을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수리와 홀은 각기 큰한 덕이에게 아뢰었다.
까짓것 돌과 불화살로 공격하면 내성은 한식경이면 깨뜨려 버릴 수 있읍니다.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문을 부수고 한편으로는 사다리와 통나무를 벽에 걸고 보병들을 기어붙게 하면 될것입니다.
그러나 덕은 생각이 달랐다. 공격을 늦추지 않게되면 사나와진 병사들은 내성의 사람들을 거의 살려두지 않을 것이며, 또한 궁지에 몰린 자들은 결사대로 변해버릴 터였다. 또한 덕이로서는 큰한과 그의 측근들과 조선족 비장을 꼭 사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대의명분을 올바로 살리면서 조선에게는 철두철미한 승리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조선과 강화를 하는데도 매우 유리하겠기 때문이었다. 덕이 말했다.
처음에 일렀던대로 백성들은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지 말것이며, 특히 호족의 식솔들은 모두 집으로 보내주고 집과 재물에 손을 대지못하게 하라. 그 뿐 아니라 다친 조선족 병사들은 보살펴 주고 먹을 것을 줘라. 이러한 조처를 하고나서 호족들의 가족 가운데 나이 든 자들 몇 사람을 데려 오너라. 그동안 군사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성을 둘러싼 채로 기다린다.
비장 홀과 갈래물의 한 온수리가 달려나가 각 백장들에게 알려 시행토록 하였고, 저녁 때에 호족의 식구들이라는 노인 다섯사람을 데리고 큰한의 영막으로 찾아왔다. 노인들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덕이는 준비했던 음식을 권하면서 공손히 말하였다.
내가 여기 온 것은 같은 부족끼리 피를 흘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먼저 조선이 강대함을 믿고 신시 이래 밝 종족이 화합하여 잘 살도록 하신 환웅님의 가르치심을 거역 하였으니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저들은 우리 종족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연합의 뜻에 따르고 구한의 갈래와 관경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조선에서 와서 위협으로 뽑아 놓은 큰한은 진정한 한이 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설이 화려한 옷과 깃털로 장식한 관모를 쓰고 들어 왔다.
나를 알아 보시겠소? 나는 일찌기 돌아가신 큰한 외에는 아무도 그 승계를 인정할 수가 없어서 북방으로 달아 났다가 이렇듯 진정한 큰한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이요. 이분이 진정한 큰한이라는 것은 우리 관경에서 절반이 넘는 저 광활한 땅의 백성들이 화백 모임을 열어 뽑은 큰한이시기 때문이요.
호족들은 설을 보자 모두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덕이 말하였다.
내 어른들을 이와같이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 필요 없는 살상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조선 비장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관경 밖으로 나가면 될 것이요. 큰한 이하 호족 관리들은 앞으로 화백 모임의 결정에 따르면 모든 일이 평화롭게 해결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권유를 듣지 않고 끝까지 싸움을 고집 한다면 우리 군사들은 삽시간에 내성을 깨뜨리고 진입하여 한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장로들께서 막아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모신 것입니다. 이 길로 내성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간곡한 뜻을 전하기 바랍니다.
호족의 노인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나갔다. 그들은 포위한 청구군의 삼업한 열을 지나서 천천히 내성 문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라. 전할 말이있어 왔다.
그중의 하나가 소리치니 수직하던 군사가 위에 알리고 나서 곧 문을 열어 주었다. 호족 노인들의 자식들이 달려 나왔고 그들은 곧 대읍의 큰한에게도 안내되었다. 노인들은 설과 덕이가 이르던 말을 충실히 전하고 나서 의견을 말하였다.
대세가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성문을 열고 나가십시다. 화백모임을 다시 열겠다 하였으나 모두 우리의 혈족들이라 우리에게 유리할 듯 합니다.
그러나 조선족 비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저들은 화백 모임의 장로들을 지난번 큰 한의 혈족들로 바꿀 것이요. 나는 저들이 제의 한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겠소. 큰 한과 다른 이들도 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 갔다가 병력을 증강하여 돌아 옵시다. 대읍은 반드시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의논하여 성문을 열되 조선수비군과 큰한의 일행이 조선으로 가도록 귀로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온수리와 홀은 반대하였으나 덕이가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응낙하였다. 설이 말했다.
조선 군사가 돌아가는 길을 열어준 것까지는 앞으로 강화를 이룰 적에 필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일찌기 다른 부족세에 힘 입어 큰한의 자리에 올라 제 식구들을 억누른 자를 어찌 돌려 보내십니까? 조선에서는 앞으로 반드시 저 큰한이란 자를 앞세워 청구에서의 권리를 주장해 올 것입니다.
그점은 너무 염려마시오. 큰한의 잘못은 누구보다도 백성들이 잘 알게 될거요. 저 자가 달아난 뒤에 조선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오면 그때야 말로 우리는 청구 백성을 우리와 더불어 굳게 뭉치도록 할 수가 있소. 지금 저들을 붙잡아 죽이거나 화백 모임을 열어 잘잘못을 따지게 되면 오히려 우리쪽이 간계를 써서 그를 몰아냈다고 비난을 받게됩니다. 그 보다는 큰한이 대읍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게 하여 그가 조선족의 수족인 것을 알도록 해줍시다.
내성에서의 요청은 곧 받아들여 졌고,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은 길을 내주고 양쪽으로 삼엄하게 벌려섰다. 이윽고 횃불빛이 휘황한 가운데 내성에서 초라한 잔여 병력과 큰 한의 혈족들이 몰려 나왔다. 그중에는 조선으로 가기를 거부한 이들도 있어서 곧 열을 떠나 가족들에게로 돌아갔고 조선 수비군 일행은 내쳐 행군하여 청구와 조선의 관경이 나뉘는 지점에 까지 나아갔다. 거기서도 봉우리와 강을 지키던 청구군이 길을 열어 주어 무사히 조선 관경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다.
조선 대읍에 있던 섭정 한배는 청구에 나갔던 비장의 보고를 받고 몹시 놀랐다. 그런 세력이 새롭게 성장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초지종을 듣고나서 놀란 것은 그 새로운 큰한이 내린 여러가지 조처가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었다. 섭정이며 큰 한인 한배는 친위비장 우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킬 것인가를 신중하게 논의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청구의 새로운 세력에 대하여 전혀 아는바가 없으며 그들이 앞으로 조선에 대하여 어떻게 나올지도 아직은 모르는 터이니 기다려 보자고 합의가 되었다.
한배는 한편 사람을 풀어 청구땅으로 보내어 새로운 큰 한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 났으며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고, 조선의 관경에는 병력을 증강 하였다. 얼마후에 청구에서 사자가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고 한배는 곧 그들을 만나기로 하였다. 사자로 온 것은 상겸 박사 설이었다. 그는 동호의 한혈마 중에 고른 백마 한쌍과 구리로 만든 검과 호랑이 가죽을 예물로 바쳤다. 설은 구한의 예에 따라 세번 절하고 무릎 걸음으로 나와서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공손히 꿇어 앉아 한배에게 아뢰었다.
청구의 상겸 박사 설이 문안 올립니다. 저희 큰 한께서 저를 직접 보내신 뜻은 우리가 피치 못하여 우리의 대읍을 되찾게 된바를 소상히 알려 드리라는 분부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큰 한께서는 같은 종족으로서 비록 지파로 갈린 부족 사이라 하지만 필요없는 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저희 큰 한께서는 일찌기 청구북방의 마을 연합 가운데 호족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전사들을 모아서 동호를 정복하여 수천리의 땅을 얻었고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계시는 큰한 중의 큰 한입니다. 북방의 유목부족들을 몰아 내시느라 분주한 가운데 대읍에서 변고가 있어 조선 군의 힘에 의하여 큰한이 화백 모임의 결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바뀌었음을 못내 섭섭히 생각하시고 이에 청구 큰 한의 승계에 정통을 세우고자 군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이제부터 우리의 장로들의 의견이 모아지는 화백 모임을 존중해 줄것과 신시 이래 각 부족 사이에 맹약된 구한의 지파를 인정할 것과 청구의 관경을 침범해서는 안될 것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조선과 청구가 협의하여 지금 천하에 뿔뿔이 흩어져 차츰 이민족들에게 능멸당하는 밝종족을 한식구로 모으고 강대한 종족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희 청구 큰 한께서는 조선의 큰한과 직접 만나서 강화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설이의 긴 설득의 말이 끝나기를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던 한배가 부드럽게 말하였다.
매우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잘 알수 없는 점이 있군요. 큰 한은 아무나 제마음대로 오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는 그분이 청구의 호족가운데 어느 집안 한의 아드님이 었는지 들은 바가 없읍니다.

<그림 강 행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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