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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의 법」이 혼란 부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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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국 역사상 정치와 제도가 가강 타락했던 시대를 사가들은 명나라로 꼽는다.
명의 건국은 한토 광후이라는 민족대의를 명분으로 내걸고 몽원정권을 실력으로 타도해 이룩한 값진 결실이었다.
정권은 한민족의 손으로 돌아왔으나 백성들은 혁명과 광복의 기쁨 대신 또다른 압정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혁명도 마찬가지지만 명대조 주원장이 내건 당초의 명분과 공약은 그럴싸했다.
그렇지만 주원장은 천하를 자신이 칼로 차지한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사물시하는 사고는 당연히 정치의 일인전제로 연결됐다.
주나라이래 중국의 옛 정치는 조정과 사림의 선비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운영되는 것이었다.
군주와 백관은 행정권과 병권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선비들은 언론과 탄핵권을 가지고 정부를 감시, 비판했다.
한·당·송의 역대왕조를 거치면서 전통으로 형성된 이상적인 부교율도 절대권력 앞에서는 제기능을 할수 없게 됐다.
주원장은 중국정치에 민본주의의 근거를 정립한 맹자의 사상을 매우 못마당하게 생각했다. 궁리끝에 맹자의 책속에 민본주의를 강조한 부분은 모두 삭제하거나 수정토록하고 나중에는 공묘 안의 우자 위패까지 부숴버리도록 명령했다. 선비들을 억압하고 언론을 막아버렸다.
공권력은 마치 심판관이 없는 「링」외의 무법자와도 같이 상대를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온갖 반칙과 위법에다 자기에게 유리한 수단은 모두 동원하면서 심판관까지 때려 눕히는 정황이었다.
군주와 백성 사이에 완충적 매개는 존재할수 없었다.
「짐이 곧 법」이었고 적나라한 공권력은 그대로 힘없는 백성들의 머리를 짓눌렀다.
『천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머슴이어야 하는데 오늘은 군주가 주인이요 백성이 머슴이 되었다. 온 천하백성이 편안할 겨를이 없는 것은 군주 탓이다. 군주의 자리를 차지못한 자는 백성들을 수단으로 천하를 빼앗는데 혈안이 되고 온갖 모반을 강구한다. 그리하여 얻어놓은 다음에는 얻은 천하를 도둑맞을까 지키느라 채우고, 잠그고, 막고, 걸고, 닫고, 있는방법을 다 써서 방지하려든다.
천하가 어느 개인의 것이 되면 쟁탈을 거쳐서만 주인이 바뀐다. 잡은자는 빼앗기지 않으러하고 못잡은 자는 빼앗으려고 싸움을 벌인다. 그 싸움 속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백성들뿐이다…』
명조의 사상가 황종희는 마침내 이렇게 타락한 정치에 분노의 절규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법치」를 제시했다.
『법이란 천하를 공유화하여 사유화하는 것을 막기 의해 있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그 법은 공정과 무사가 생명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좌우할수 없는 초월과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어느 한사람의 손아귀나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지키는 공기로서 개방되어 존재한다.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군주의 이기는 될지언정 천하의 공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이 바뀌어야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법도 수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법이 멋대로 요리되고 그것을 통해 힘가진 자의 자리가 지켜질때 법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그럴수록 편법의 방법도 교묘해진다.
마치 도둑을 막는 방법과 그것을 뚫고 도둑질해내는 방법이 정비례해 발전하듯 천하의 혼란이 법속에서 생겨난다. 이른바 「비법의 법」이다.「법대로」가 아무리 강조되어도 법다운 법은 없고 법을 믿고 살수도 없게된다.
법을 개인의 손에서 빼앗아 천하의 공기로 환원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법은 법으로 존재하고 그래야만 그 법으로 천하를 다스릴수 있다는 것이다.
황종희는 또 법이 권력의 도구로 역할하는 곳에서는 공박으로서의 관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슬프다. 군주는 신하를 등용하되 천하 만민을 외해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손발이 되어 바쁘게 복종할 종으로 뽑는다. 그러니 등용되는 이는 능력도 없거니와 자아의식도 없는 아주 하류들만이다. 그들은 과분히 등용된 것이 감지덕지해서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충견이 되어서 날뛴다. 군주가 조금만 추켜주면 원래의 직분과 위치를 망각하고 주구와 다름없는 무염치를 도리어 자랑스럽게 저지른다….』
당시의 정치를 논한 황종희의 『명이대방녹』의 한 구절이다. 이러한 명조의 정치타락은 중국의 정치를 3백년 후퇴시켰다고 후세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황종희의 분노와 절규는 남의 나라절대왕정의 병폐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런데도 시대와 당을 전혀 달리한 우리 귀에도 이런 것이 남의 나라 옛날일같이만 들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법대로」를 내세워 정치를 거부하면서 「법대로」 하지 않아 어이없는 사건들을 잇달아 빚어내고 사회에 불신과 갈등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만화경의 상황 탓일까.
대체 우리 사회의 「법의 지배」는 황종희가 『명이대방녹』을 엮던 때보다 과연 열마나 진보했다고 할수 있을지 되돌아보게 된다.
문명한 법치국가 시민의 자긍심에 말할수 없는 상처를 입힌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그 조작·은폐사건이 4개월여의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되는 것 같다.
일찌기 없던 인책 개각으로 정부도 반성의 뜻을 표시했고 그에 따라 민심도 진정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명조의 왕권처럼 권력을 사물시하고 법을 그 도패로 여기는 사고가 우리 권력 주변에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한 시대착오의 왕조적 사고가 근대적 법치의 허울을 입고 있는데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이토록 더디고 시련을 겪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그런 점에서 새로 들어선 내각은 모쪼록 국민에 대한 공복의 책임보다 임명권자의 은총에 충성 보답을 앞세우는 「왕조의 대신」이 아니기를 바란다.
법이 아닌 법을 법이라고 우기면서 정작 법을 우습게 아는 적반하장도 이제는 끝을 맺어야할 때다. 거짓과 억지가 오래 못가는 것은 이번 박종철군 사건에서 또한번 너무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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