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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동아시아의 체스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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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이 되어 일본과 중국에서 장기간 근무하다보니 한반도의 지정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100여 년 전에 우리가 일본에 강제병합된 것도 일본의 침략 야욕이 있었지만 주변 강대국의 지정학적 이해도 관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군사시설을 만들어 자유항행을 위협하고, 일본은 숙원의 재무장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정치 외교의 아웃사이더 도날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 등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이 흔들리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여 도서 출판사 현학사의 도움으로 ‘동아시아의 체스판이 흔들린다’는 졸저를 출판하였다. 서양장기의 체스판은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Grand Chessboard)’을 원용한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거대한 체스판’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북한은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를 기만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해오고 있다가 새로운 독재자 김정은의 절제되지 않은 젊음의 광기로 그 기술이 예상보다 빨리 고도화되고 공격적이 되면서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의 안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냉전의 승리자가 된 미국은 미래를 내다보는 지정학적인 전략을 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내가 2년간 유학한 컬럼비아 대학 교수였다.

미국 유학과 브레진스키 교수와의 인연
1970년대 말 외무부에 입부한 나는 국비로 미국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외교관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국제관계로 유명한 몇 개의 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을 선택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에는 당시 헨리 키신저 박사와 함께 국제관계학에서 쌍벽을 이루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폴란드 태생으로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됨에 따라 돌아 갈 조국을 잃게 되어 캐나다와 미국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보니 때마침 브레진스키 교수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 되어 대학에서는 휴직 상태였다. 카터 대통령은 땅콩 농장을 경영하다가 조지아 주 지사가 되었고 다시 민주당의 후보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국제관계에서는 문외한이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카터 대통령의 국제관계 가정교사였다.

카터 후보는 월 1회 뉴욕에서 브레진스키 교수에게 국제관계에 대해 자문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카터 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연스럽게 안보 보좌관이 된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브레진스키 교수의 지도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많은 선배들도 새로운 지도 교수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쨌든 컬럼비아 대학 재학 중에는 아쉽게도 브레진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지 못하고 졸업하였다.

도광양회의 틀을 깨고 나온 중국의 굴기
동아시아의 체스판을 흔들고 있는 나라는 우선 중국이다. 중국은 서방 세계의 지원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 개혁 개방 정책을 성공시켜 2010년 처음으로 일본을 능가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개혁 개방 정책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아래와 같은 24자의 외교방침을 상당기간 지속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冷靜觀察 站隱脚? 沈着應付 韜光養晦 善於守拙 絶不當頭”
(냉정관찰,참은각근,침착응부,도광양회,선어수졸,절부당두 즉 냉 정하고 조용히 관찰하지만 입지는 분명히 세우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힘을 아껴 보존하며 부족함을 잘 지켜 결코 나서 지마라)

특히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실력을 키우라는 도광양회 정책을 강조하였다는 데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신감인지 도광양회의 틀을 깨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우유부단했던 전임자 후진타오 주석과는 달랐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문제며 중동문제에 빠져 있을 때 남중국해 산호초를 매립하여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재무장
두 번째는 일본이다.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70 여년이 지나 일본에서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사망하거나 전쟁의 기억이 풍화되고 있다. 일본인들 가운데는 이른 바 라쇼몽(羅生門) 현상(기억의 주관성)에 의해 태평양 전쟁의 가해자라기보다 원폭에 의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다.

2012년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자민당 아베(安倍晉三)정권은 과거 1년에 한번 씩 바뀌던 단명 총리와 달리 2021년까지 장기 집권을 예정해 놓고 있다. 일본은 과거 미국의 보호막 속에 안주하였으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로 일본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개헌선인 국회의원 3분의 2를 확보해 두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금의 평화헌법 개정을 강조하고 있다. 재무장의 재원확보를 위해 아베노믹스가 성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스판을 뒤흔드는 트럼프 쇼크
동아시아의 체스판을 가장 크게 흔들 지도자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 트럼프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아시아에서 어떤 한 나라가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to Asia) 정책을 통하여 중국을 견제하여 왔다.

지난 11월 8일 미국의 대선에서 일반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12월 3일 자신의 트위트에 “대만 총통이 나의 당선을 축하해주는 전화를 걸어 주었다.” ( The President of Taiwan CALL ME today to wish me congratulations on winning the Presidency. Thank you!)라는 내용을 공개하였다.

‘하나의 중국’ 정책이 흔들리게 된 중국이 크게 반발하였다. 미국이 대만과 단교 후 37년 만에 처음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자는 1시간 후 자신의 트위트에 다시 글을 올린다.“미국에서 무기를 많이 사가는 대만 총통으로부터 축하전화도 받지 말라는 말인가”( Interesting how the U.S. sells Taiwan billions of dollars of military equipment but I shoud not accept of a congratulatary call.)라고 오히려 화를 냈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조야에서도 기존 외교의 프로토콜을 깨는 즉흥적 외교(improvisational diplomacy)에 비난이 쏟아지자 트럼프는 12월 5일 다시 자신의 트위트에 “중국은 우리에게 물어보고 윈안화 평가절하를 하였으며 우리에게 물어보고 남중국해에 거대한 군사시설(massive military complex)을 만든 것이냐?”라고 반박을 하였다.

협상의 달인 트럼프의 생각은 단순하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 중국과의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협상가들이 즐겨 쓰는 기선제압이다. 중국의 허(虛)를 찔러 기(氣)를 꺾어 놓아야 협상이 잘 풀린다는 생각이다.

대만 총통과 계산된 통화로 ‘하나의 중국’ 정책만 믿고 있는 중국에게 ‘기막힌 일격(brilliant stroke)'을 가한 것이다. 중국이 협력해주면 ’하나의 중국‘ 원칙도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에게는 북핵문제, 남중국해의 자유항행 문제 등 중국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협상용 카드로 쓰겠다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떠오르는 중국의 비호아래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여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에서 중국을 제압하는 일이다.

북한은 중국의 베이비(baby)이고 중국의 문제이므로 북한의 핵 과 미사일 문제는 중국이 맡아서 풀어내라는 것이다. 중국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트럼프는 대만 총통 차이잉원(蔡英文)과 통화하듯이 김정은과 직접 거래할지 모른다는 관측도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부틴 대통령을 회유 크리미아 반도 병합으로 소원해진 미러 관계를 복원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부틴의 오랜 친구이자 석유기업 엑슨 모빌의 최고 경영자 렉스 틸러슨을 외교수장 국무장관에 낙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트럼프의 친 러시아 정책에는 현재 최고의 밀월관계인 중러 관계를 이간시키려는 고도의 협상술이 숨어 있다고 본다.

꽃놀이패를 든 러시아의 부틴 대통령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어렵다. 주력 수출품인 원유가격의 하락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를 병합한 2014년부터는 구미의 경제제재로 GDP 기준으로 세계 8위였던 러시아 경제가 2015년에는 세계 12위로 추락했다. 정치적으로도 G8(주요8개국)에서 추방되고 시리아 내전문제로 오바마 정권과 갈등의 골이 깊었다.

크리미아 병합이후 80%대의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부틴도 201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는 경제를 호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부틴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12월 15일 아베 총리의 고향 야마구치(山口)에서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의 경제협력을 받아 내고자하나 북방영토(쿠릴 4개섬) 문제에 있어 일본이 원하는 양보의 가능성이 낮아 타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반 부틴 기조의 민주당 클린턴 후보를 꺾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트럼프의 당선으로 부틴에게는 봄이 찾아 왔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예상되는 험난한 미중 관계에서 부틴은 꽃놀이패를 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더구나 오랜 친구가 국무장관으로 내정되어 대미 외교에 순풍이 예고되어 있다. 대일 외교에도 유리한 국면이다.

한국의 나침반으로 외우내환 극복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다수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국민들은 즉각 퇴진을 외치며 영하의 추위 속에서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까지는 시간이 소요되는 탄핵정국에서 한국 국내의 불안이 계속되고 외교의 공백이 불가피해 보인다.

트럼프의 예측불가의 럭비공 외교로 동아시아의 체스판은 흔들리는 수준을 넘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계획도 못 세우고 있다.

‘크레이지 맨’ 김정은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국은 주변 4강의 ‘스트롱 맨’을 상대해야 하는 국력을 모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탄핵정국에 여야 정치인의 갈등으로 국력이 분산되고 있는 점이다. 외우내환이 따로 없다.

한국의 운명은 국내 정치를 하루 빨리 안정화시키고 체스판을 뒤 흔드는 4강과의 외교에 달려있다. 그들의 행보에 주목하여 객관적 사실(fact)과 현실을 정밀 분석 치밀한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체스판이 흔들릴수록 우리 자신의 나침반(compass)을 만들어 중심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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