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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어설픈 구조조정, 해운 6대 강국서 변방으로 추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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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9월 부산신항 한진해운 부두를 찾은 유일호 경제부총리 . 한 달 후 해운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 나왔지만 한진해운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사진 송봉근 기자]

지난 9월 부산신항 한진해운 부두를 찾은 유일호 경제부총리 . 한 달 후 해운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 나왔지만 한진해운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사진 송봉근 기자]

한국 해운업의 ‘대항해 시대’가 저물었다. 한진해운이 13일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삼일회계법인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파산6부에 한진해운 실사보고서를 제출했다. 한진해운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담겼다.

한진해운, 사실상 사망선고까지
“용선료 협상 불발되면 법정관리”
유일호 발언이 되레 해외협상 방해
하역대책 없이 법정관리 보내고
정부 “한진이 책임져라” 윽박만
임종룡 “원칙 지켰다” 말하지만
시장선 실패한 구조조정 규정

이로써 수백 척의 한국 선박이 대양을 가르던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현대상선도 온전한 해운동맹을 맺지 못하면서 글로벌 6대 해운강국이던 한국의 위상은 순식간에 변방국 수준으로 추락했다.

반도 국가에서 해운업은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외나무다리였다. 우리나라 수출입 물동량의 99.7%가 해상 운송을 통해 이뤄진다. 원유·철광석 등 일부 에너지 자원은 100% 바다로 들어온다. 다른 해운강국이 해운업을 유지하려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건 해운업이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기간산업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을 되짚어보면 정부와 업계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2001년 조양상선 파산 당시 우리나라는 이미 물류대란을 경험했었다. 당시 조양상선을 이용한 화주들은 컨테이너를 되찾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정부가 8월 31일 한진해운 법정관리를 결정했다면 물류대란을 피하기 위해 하역비 지원 방안을 미리 강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해양수산부 합동비상대책반은 “한진그룹이 책임져라”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전문가들은 한진해운에 회생 여지를 남기려면 정부가 정기선 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부터 강구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2008년 정기선사 C&라인의 배 단 1척이 싱가포르에서 억류되는 순간 전 세계 항구가 일제히 선박 하역 작업을 거부했던 역사를 되새겨야 했다. 당시 불과 보름 만에 C&라인 소속 선박은 전부 억류됐고 법정관리 상황도 아니던 C&라인은 청산해야 했다. 정부가 대책 없이 법정관리를 결정한 순간부터 한진해운은 회생 가능성이 없었던 셈이다.

협상 전략도 어설펐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월 공개 석상에서 “용선료 협상이 안 되면 법정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압박했다. 세계 11위 경제대국의 부총리가 공개적으로 ‘국제 거래에서 돈 떼어먹어라’고 요구한 셈이다. 심지어 이 발언은 되레 용선료 협상을 방해했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용선료 인하를 요구한다면 선주 입장에선 돈을 몰래 깎아줄 수도 없다. 배를 빌려준 다른 해운사가 너도나도 같은 요구를 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해운업의 특성을 무시한 채 일괄적으로 부채비율을 400%로 줄이라고 압박한 것도 정부다. 우리 해운사들은 이 기준을 맞추려고 벌크선 사업 등을 포기하고 선박·터미널 등 알짜 자산을 팔아치웠다. 영국 해운경제학자 마틴 스토포드 박사는 “선사가 불황기에 선박을 매각하는 행위는 투매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경기순환산업의 특성상 호경기를 기다려 선박을 매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을 인수하도록 하겠다”거나 “부산항 환적화물 이탈을 방지하겠다”는 정부 약속도 모두 공수표였다. 한진해운 핵심 자산인 미국 롱비치터미널은 스위스 선사인 MSC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고, 한진해운의 미주·아시아 노선 영업권은 삼라마이더스(SM)그룹에 넘어갔다. 또 10월 부산항 환적화물(81만6717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은 전년 동기 대비 6.5%나 감소했다. 지난해 한진해운과 해운동맹 선사들이 가져온 부산항 환적 화물(150만 TEU)이 사라지고 있어서다. 정부는 또 한진해운이 사라져도 물동량을 현대상선이 흡수한다고 장담했다. 사실일까. 법정관리 이전 61만3364TEU였던 한진해운 물동량은 12일 6만2233TEU로 줄었다. 같은 기간 현대상선 물동량(40만8823TEU→45만5859TEU)은 거의 그대로다. 한진해운 몰락에 따른 과실을 해외 선사가 따먹은 것이다.

시장은 해운업 구조조정을 실패로 규정짓지만 당국자들은 여전히 이를 부인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한진해운 처리 문제는 해운업 구조조정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했고 유일호 부총리는 “한진해운이 자구 노력부터 어긋나고 용선료 협상도 제대로 되지 않아 원칙에 따라 처리했다”고 말했다.

글=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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