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편과 자식외엔 남"|핵가족·경쟁사회가 부채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5년째 국민학교 교사로 있는 서울강남구 K국민학교 박인숙씨(57)는 늘 새학년이 되면 괴롭다. 『우리아이를 공부가 잘 되도록 앞자리에 앉혀 달라』『반장이 되도록 힘을 써달라』는 등 어머니들의 은근한, 때로는 노골적인 요구가 갈수록 늘기 때문이다.
『하루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같은 아파트 앞동 친구집엘 간다더니 곧 돌아왔어요. 그집 엄마가 그집 아이간식시간이니 돌아가라고 하더라고 해서 놀랐어요.』가정주부 김정순씨(40·서울 반포동B아파트)의 얘기.
이처럼 키와는 상관없이 내 아이만 앞자리에 앉아 공부 잘하고 반장만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어머니들, 옆집 어린이에게조차 과자 한 개·사과 한쪽 나누어 먹일줄 모르는 내자식만 아는 젊은 어머니들이 늘고 있다.
그 밖에도 비밀과외·예능교육 등 자녀교육과 관련된 엄청난 치맛바람·부동산 투기·과시적인 혼수 등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현상의 상당부분이 핵가족의 주부들이 그 주도자로 되어 있다.
날로 심화되고 있는 가정에서의 노인소외현상, 고부간의 갈등 등도 『남편과 자식외에는 남』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주부들의 지극히 좁은 시야의 가족관에 연유한다고 가족학자들은 진단한다.
주부들이 우리집 담 안의 일에만 주로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일터와 가정이 엄격히 분리된 산업사회의 한 특징 때문이라는 것이 조은교수(동국대·사회학)의 얘기. 가정주부로의 삶이 자신의 일차적인 존재양식이 되어버린 여성들에게 가족주의는 바로 그들 가치관의 핵심이 되어 대다수의 주부는 자신의 수고가 보상될 수 있는 가족집단의 지위향상을 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가족 하에서 소비·저축·가사운영·친족관계·자녀양육과 교육 등을 도맡게 된 주부들은 남편출세와 경제력 향상, 자녀 성적향상을 향해 전력투구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혜성교수(이화여대·교육심리학)는 『오늘날의 가족적 이기주의의 부정적인 사회현상은 경제·사회·문화, 나아가 정치현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느니만큼 그 탓을 주로 주부들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이러한 주부들의 가족적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조혜정교수(연세대·사회학)는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가족간·부부간에만 맺어봤던 의미있고 중요한 관계를 가족밖으로 확대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또 살림하는 동안 틈틈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등 평생을 통해 흥미를 느끼며 할 수 있는 취미를 찾는 것도 바람직하다.
『주부들이 우리집단·우리사회가 잘 되어야 궁극적으로 내가정의 행복과 안녕도 보장된다는 의식을 갖는 풍토조성이 필요합니다.』 주부들에게 사회의식·시민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여성 및 사회단체, 각급학교와 매스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안정남씨(숙명여대강사·인류사회학)는 강조한다. <박금옥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