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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조슬예의 아는 사람 이야기] 그가 그녀처럼 옷을 입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친한 동생인 황군과 점심 식사를 함께할 때였다. 하늘거리는 자주색 원피스, 핑크빛 메리 제인 슈즈, 완벽한 풀메이크업, 찰랑이는 긴 생머리…. 황군을 찬찬히 훑어보던 내가 ‘오늘도 역시 예쁘구나’ 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황군이 말했다. “언니, 수연이가 전화를 안 받아.”

수연씨는 황군의 여자친구로 (여러 번 만난 건 아니지만) 나 역시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장난기가 많아 곧잘 남을 놀리면서도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는 것이 그녀의 제일 큰 매력인데, 반대로 황군은 적정선 안에서 놀림당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변신 로봇이 합체해 완전체가 된 것처럼 안정감이 있어 참 좋았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사실 예상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황군의 예쁜 모습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황군이 울먹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이 모습을 들켜 버렸어. 충격받았겠지? 이제 다 끝난 걸지도 몰라.”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아꼈는지 알기에,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결국 그날 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수연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 편지의 일부를 옮겨 적은 것이다.

수연씨에게

(전략)

수연씨와 황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에 마음 상하지 않길 바랍니다. 황군은 많이 힘들어하면서도 수연씨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를 더 염려하고 있어요. 수연씨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제게 조언을 구했지만, 저 역시 쉽게 답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님에도) 뒤늦게 이런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황군을 수연씨도 알아주길 바라서예요. 물론 이후의 판단은 모두 수연씨의 몫이고, 그 결과를 반대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이것만큼은 믿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황군을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겨울입니다. 당시 저는 기획 중인 시나리오 때문에, 취재차 트랜스젠더 모임에 나가게 되었죠. 거기서 황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황군은 자신이 ‘트랜스젠더(Transgender)’가 아니라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두 용어의 차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황군은 그런 제게 전혀 귀찮은 내색 없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죠. 당시 들었던 황군의 말을 요약하자면, 트랜스젠더는 육체적으로 타고난 성(性)과 정신적으로 인지하는 성이 다른 사람이고, 크로스드레서는 성 정체성이 상반되진 않지만 이성의 복장을 즐겨 입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더군요. 스스로 남성이라 생각하면서 여장을 즐기는 심리도, 여장을 하면 겉모습만이 아니라 말투나 행동까지 달라지는 것도 말이에요. 그런 저에게 황군은 말했습니다. “‘역할극’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때요? 제 경우엔 여장하는 것이 배우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며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수연씨도 알다시피 말주변이 없는 황군이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적절한 표현으로 제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 줬어요. 왜냐하면 이 문제는 황군이 어릴 적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죠. 황군이 처음 여장한 것은 중학교 때라고 해요. 만우절에 장난삼아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교복을 바꿔 입었는데, 끔찍하게 싫어하는 다른 남학생들과 달리 황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묘한 설렘을 느꼈대요. 그 뒤로 ‘다시 여자 옷을 입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 때마다 자신이 트랜스젠더가 아닐지, 더 나아가 게이는 아닐지 걱정됐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그런 문제에 더 민감하고 두려울 나이니까요. 결론은 두 가지의 경우 모두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황군이 자신을 속이고 수연씨와 사귈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후략)

편지를 보내고 나서 며칠 뒤, 황군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괜한 일을 벌인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기에 약속 장소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더뎠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수연씨와 여장한 황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모두 내 편지 덕분 아니냐며 의기양양해 하자, 수연씨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우연히 킨다이치 렌주로의 만화 『그=그녀』(학산문화사)를 봤어요. 그 만화 속 남주인공은 사고로 죽은 전 여자친구의 아들을 입양해 키우게 되는데,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아이가 계속 엄마만 찾으며 애타게 울어대요.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나머지 그는 여장을 하고 엄마인 척하게 되죠.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에요. 밖에선 평범한 샐러리맨, 집에선 완벽한 미인 엄마. 이 피곤한 이중생활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물론 처음에는 순수하게 아이를 위해서였지만 어느 순간 본인도 여장을 즐기는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이죠.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그런 주인공에게 ‘나츠미’라는 멋진 여자친구가 생기거든요. 어떤 점이 멋진가 하면요. 나츠미는 이 특이한 연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 ‘그가 여장한 상태에선 많은 걸 공유할 수 있는 동성 친구 같은 연인 사이, 남장한 상태에선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더해져 더욱 설레는 연인 사이 같아. 마치 양다리 연애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라고요.” 무심코 빠져들어 듣고 있던 나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수연씨 말은, 황군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내 편지가 아니라 그 만화 덕분이라는 거죠?”

내 말에 그녀가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웃었다. 역시 남 놀리는 재주가 남다른 그녀다. 물론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날 우리 세 사람은 실컷 떠들고, 정신없이 웃으며, 미친 듯이 먹었다. 즐거운 마음에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밤이 깊어 술에 취한 황군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는 수연씨의 집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쌓여 있는 만화책과 영화 DVD였다. 모두 여장 남자가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황군을 이해하려 노력한 그 흔적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수많은 작품 중 그녀에게 가장 큰 심리적 변화를 일으킨 영화는 바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2014, 프랑수아 오종 감독)였다고 한다. 주인공 클레어(아나이스 드무스티어)는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공유해 온 친구 로라(이실드 르 베스코)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상심에 빠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조언에 따라 로라의 남편과 아이를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로라의 남편 데이빗(로망 뒤리스)이 여장한 채 아이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비밀스럽게 만나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 간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 데이빗은, 여성으로 살고 싶어 하는 동시에 클레어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품는다. 클레어는 로라를 향한 감정이 친구 이상이었음을 깨닫고, 버지니아(여장한 데이빗)에게 로라를 투영한다. 복잡하고 미묘한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오히려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후반부에 이르러 클레어는 버지니아를 통해 로라의 환영을 쫓는 걸 그만둔다. 남성의 육체에 여성의 정신을 가진, 그와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데이빗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감흥을 느낀 거군요?” 내가 물었다. “아뇨, 데이빗을 보니 우리 황군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녀가 답했다. 역시 그녀의 매력에는 당할 수가 없다.

글=조슬예. ‘잉투기’(2013) ‘소셜포비아’(2015) 등에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 남의 얘기를 듣는 것도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해 ‘아는 사람 이야기’까지 연재하게 됐다. 취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다 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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