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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또 갖고 싶어요, 새 립스틱 … ‘있어빌리티’가 부른 립스틱 홀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4면

립 제품 전성시대

경제 불황기엔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사치품 판매만 증가하는 립스틱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최근엔 단순히 불황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립스틱 판매 호조 현상이 너무나 뚜렷하게 오래 지속되고 있다. 립스틱 효과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1만~6만원대로 즐기는 '작은 사치품'?
SNS 활용 늘며 제품 수집 '립덕후'도 등장
국내서 못 구할 땐 해외 사이트 직구도

립스틱만 팔리는 요즘, 립스틱 효과?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입생로랑의 한정판 립스틱 루쥬 쀠르 꾸뛰르 스타 클래쉬 에디션을 구입하기 위한 줄이다. 중국인 관광객 비중이 높았지만 내국인도 적지 않았다. 신세계 본점에는 아예 번호표가 등장했다. 지난달 1일 1차 출고 당시 구매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번호표를 배포한 것이다. 롯데백화점 본점의 입생로랑 매장 관계자는 “1차 출고 때 사람이 몰려 3~4시간 만에 완판 되었다”며 “2차 출고 때는 수량을 넉넉히 준비했는데도 중국인 고객까지 몰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전부 동났다”고 말했다.

요즘 백화점 화장품 매장은 오랜만의 매출 호조로 화색이 돈다. 일등공신은 색조 메이크업, 그 중에서도 립 제품이다. 롯데백화점의 올 1~10월 색조화장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0.4% 늘었다. 롯데닷컴의 10월 립 제품 매출 역시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했다.

한때 스킨케어가 백화점 화장품 매장 매출을 견인하던 시대가 있었다. 키엘의 수분크림을 필두로 비오템·크리니크 등 중가 스킨케어 브랜드의 활황기 말이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스킨케어가 강한 브랜드가 화장품 시장 성장을 이끌면서 진귀한 원료나 최신 기술을 앞세운 제품에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매해 두 자릿수 고성장을 기록하던 백화점 화장품 브랜드는 2010년을 기점으로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에다 드러그스토어와 중저가 로드숍이라는 대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정체하던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브랜드가 샤넬, 디올, 입생로랑, 조르지오 아르마니, 맥 같은 색조 브랜드다. 발단은 역시 립스틱이었다. 2013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이 발랐다는 입생로랑 틴트가 대박을 쳤다. 입고하자마자 품절되기를 여러 번,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어 해외 사이트에서 주문하는 직구족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여배우가 바른 립스틱은 무조건 뜬다는 흥행 공식이 생긴 것도 그 즈음부터다. 2013년 한정판으로 출시된 조르지오 아르마니 이첸트리코 컬렉션 립 마에스트로 ‘버블핑크’ 컬러는 독특한 핑크 컬러로 입소문이 나면서 완판을 기록했다. 지난 6월 한정판으로 재 출시된 후에도 황정음·김새롬의 립스틱으로 불리며 출시되자마자 완판 되었다. 한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7월 중순부터는 아예 온 고잉(on-goging, 상시판매)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백화점 매대에 특정 컬러 립 제품이 텅 비어 있는 현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지난 8월 26일에 출시된 샤넬의 루쥬 알뤼르 잉크는 출시 2~3일 만에 대다수 컬러가 완판되었다.

현대백화점 김경인 화장품 바이어는 “과거에는 한정 수량 립스틱만 품절되곤 했는데 요즘에는 상시 판매 제품도 입소문이 나서 품절되는 일이 잦다”며 “입생로랑은 많을 땐 매장 전체 매출의 40%를 립 제품이 차지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빨리 사고, 많이 사고, 쉽게 산다

립 제품의 흥행은 일부 백화점 브랜드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이니스프리나 더페이스샵 같은 길거리 중저가 브랜드숍과 올리브영·왓슨스 같은 드러그스토어,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의 자체제작 뷰티 브랜드까지 모두 립스틱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쓰리컨셉아이즈와 블리블리는 각각 스타일난다와 임블리라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만든 뷰티 브랜드로, 모델 의상 착장에 매치한 자체 제작 립스틱이 인기를 끌면서 어엿한 뷰티 브랜드로 성장했다.

특히 이런 중저가 브랜드들은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저렴한 가격과 빠른 상품 회전률로 승부수를 띄웠다. 패스트패션 브랜드와 비슷한 전략이라 패스트뷰티 브랜드로 불리기도 한다. 빨리 바뀌는 립 트렌드에 발 맞춰 빨리, 많이, 쉽게 팔고 사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립 제품 흥행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가성비’에 있다. 중저가 로드숍이라면 1만원짜리 한 장으로 최신 컬러 립스틱을 살 수 있다. 백화점에서도 립스틱만큼은 부담 없이 쇼핑할 수 있다. 맥의 립스틱은 3만원대 초반, 심지어 샤넬이나 디올도 4만원대면 구입할 수 있다. 가장 비싸다는 톰포드 립스틱도 6만원대 정도다.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즉흥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다. 약속 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남아 들른 매장에서 한 번 발라본 뒤 마음에 들면 구입하는 패턴이 가능한 이유다.

또한 SNS에서 유행처럼 번진 ‘인 마이 백 해시태그’(#in my bag:가방 안 속 물건을 공개하는 게시물) 덕분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립스틱에 힘을 줄 이유가 생겼다. 립스틱이 이른바 ‘있어빌리티(‘있어 보임’과 능력을 의미하는 ‘어빌리티(ability)’를 합쳐서 만든 말로 있어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란 뜻)’를 위한 필수품이 된 셈이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최근의 메이크업 트렌드와 연관이 있다. 피부결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선명한 컬러의 립스틱 하나만 포인트로 더하는 것, 이런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각광받는 것도 립 제품의 흥행에 일조했다. 요즘에는 쿠션 팩트와 립스틱만 팔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메이크업포에버 최윤미 차장은 “입체감이 적은 동양인의 얼굴에 컬러 포인트를 줄 때 입술을 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피부결을 화사하게 살려주는 핑크나 코랄 컬러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1년 새 구입갯수 크게 늘어

모바일 리서치 플랫폼 오픈서베이가 발표한 뷰티 트렌드 리포트 2016(20~30대 여성 1000명 대상, 2016년 1월 12일 조사)에 따르면, 색조 메이크업을 할 때 립 제품을 이용하는 비율이 89.3%였다. 아이 메이크업 제품(60%)이나 블러셔(40%)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은 비율이다. 평소 색조 메이크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물었을 때도 응답자의 42%가 입술을 꼽았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13.2%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구입한 립 제품의 개수 역시 2014년(1.04개)보다 2015년(2.57개)이 더 많았다.

온라인상에는 이른바 ‘립덕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연예인의 입술 메이크업을 똑같이 따라하고, 심지어 어떤 제품과 어떤 제품을 섞어 발랐는지를 추측해내기도 한다. 새롭게 출시되는 립 제품을 실제로 바른 뒤 컬러를 비교하는 ‘발색샷’은 기본이다. 무려 24가지 컬러로 출시된 메이크업 브랜드 맥의 립텐시티는 립덕후들 사이에서 전 색상 발색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립 트렌드는 빠르게 변화한다. 한때 길거리를 점령했던 딸기 우유빛 파스텔 핑크 컬러의 립스틱에서 최근에는 바랜듯한 핑크 컬러인 ‘말린 장미’ 컬러가 인기다. 질감도 한층 다양해졌다. 매트한 질감의 립스틱 일색에서 립밤과 섞인 컬러밤, 리퀴드 타입의 립틴트, 선명하게 물들이는 형태의 립스테인 등이 고르게 사랑받고 있다. 크리스찬 디올 관계자는 “최근 2~3년 동안 립 제품만큼 다양한 발전을 보인 카테고리가 없다”며 “컬러는 물론 마무리되는 느낌, 질감, 바르는 도구(어플리케이션), 패키지 등 여러 면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글로벌 뷰티 브랜드가 한국의 이런 빠른 립 트렌드에 주목하고 있다. 랑콤 마케팅팀 조민희 대리는 “프랑스 본사에서 주기적으로 K-뷰티에 관한 리포트를 요청해 다른 아시아 국가와 공유한다”며 “실제로 한국의 뷰티 트렌드에서 영감을 받은 립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크리스찬 디올 관계자 역시 “본사에서 항상 한국 메이크업 트렌드를 주시한다”며 “내년에 루즈 서울이라는 이름의 립스틱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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