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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에 동력 잃은 국정교과서 ‘질서있는 퇴진’ 수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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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8일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올바른 역사교과서) 3종은 다음달 23일까지 여론 수렴 과정을 거친다. 국정교과서의 운명은 그 이후에 결정된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8일 “국·검정 혼용이라든지, 시범학교 운영, 시행시기 연기 등과 관련해선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마찰 없이 재검토 명분
시행 1년 유예하는 방안 유력
차기 내각에 공 넘길 가능성
국정·검정 혼용도 또다른 대안

국정교과서가 여론 수렴이라는 과정에서 용케 살아남으면 내년 3월 중·고교 수업에서 사용될 수 있다. 정작 교육부 내에서도 이 과정을 건널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부총리가 지난 26일 김용승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과 만나 국정화 유지라는 원칙을 공유하고, 여론 수렴 뒤 추가 협의하자고 절충점을 찾긴 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굳이 ‘국정화 재검토’를 강하게 주장해 청와대와 마찰을 빚을 필요 없이 여론수렴이란 시간을 벌면서 최대한 명분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의견수렴 과정에선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란 변수도 놓여 있다. 만일 탄핵이 가결된다면 박 대통령은 직무정지 상태에 들어가며, 국정화 추진 동력은 자동적으로 꺼진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교육부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탄핵이라는 큰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수순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탄핵 직후 국정교과서를 바로 폐기하는 것은 교육부 입장에선 또 다른 부담이 된다. 특히 교육부는 ‘국정교과서=박근혜’가 아니라 ‘역사교육 백년대계’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다. 이 부총리는 지난 27일에도 “교과서는 학생의 역사교육을 위한 것이지 대통령과는 무관하다”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교과서가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명분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철회 과정으로 가는 ‘질서 있는 퇴진’이다. 국정화를 1년 유예하고 차기 내각에 넘기는 방안이다. 당초 국정교과서의 모태가 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은 원래 2018년부터 적용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내 추진을 위해 2017년으로 앞당겨진 상황이었다. 교육부의 한 퇴직 관료는 “원래대로 새 교과서의 적용 시점을 2018년으로 하고 1년 동안 국정화 여부를 재검토하며 기회를 보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려면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 시점을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늦추도록 교육부 고시를 개정해야 한다. 내년에는 현재의 검정교과서를 그대로 쓰면서 1년간 국정화 여부를 재검토하면 된다. 서울의 한 사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데 차기 내각이나 다음 정권이 뭐 하러 국정화를 지속하겠느냐”고 말했다.

교육부가 바라는 최선의 방안은 2018년부터 국·검정 혼용이다. 국정화를 강요하지 않고 학교에 선택권을 주면 국정교과서가 사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은 “국정이냐 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가 기록된 질 좋은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태어나자마자 ‘식물 교과서’

교육부가 28일 공개한 국정 역사 교과서(일명 올바른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조선 개항 이후) 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교육부는 당초 논란이 많던 근현대사 부분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번에 지켜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서술도 종전 검정교과서에 비해 대폭 늘어났다. 본지는 이날 한국교총 소속 교사·교수들과 함께 국정 역사 교과서(중학교 ‘역사’ 1·2권,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했다. 이날 공개된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연표 등을 제외한 전체 293쪽 중 133쪽(45%)이 근현대사다. 교육부는 그동안 “현대사의 경우 역사의 당사자와 직계후손이 살아 있어 논란이 된다는 비판이 있다”며 “근현대사 비중을 낮춰 40% 이하로 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또한 전체 교과서 분량이 400쪽 내외였던 검정과 비교해 국정은 100쪽 이상 줄어들었지만 이번에 공개된 국정교과서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서술은 기존 검정교과서인 금성·지학사 등의 두 배인 9쪽이 됐고 긍정 평가도 대폭 늘었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이날 “학생들이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학계의 권위자로 집필진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사 집필 교수 6명 중 역사학자는 단 한 명(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 전공)으로 집계됐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이날 “현대사 집필자 중 4명이 뉴라이트”라며 “평향된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를 당장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집필 책임자인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현대사는 연구의 역사가 일천해 전문가가 나눠 집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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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다음달 23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historytextbook.moe.go.kr)에서 현장 의견을 수렴해 교과서 내용은 물론 국정화 추진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로선 반대 의견이 많아 국정교과서만 학교에 보급하는 방안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서울에선 국정교과서 검토 자체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국정 시행을 1년 유예해 2018학년도부터 시행하거나 국정과 검정을 혼용해 교과서 선택권을 학교에 맡기자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시장 자율에 맡겨 질 나쁜 교과서가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윤석만·전민희·박형수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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