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파 인사」와 안동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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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선왕조가 몰락해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되기 시작했던 그 시기의 책들을 뒤적이다 보면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럴수 있었을까 하는 한탄을 하다가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분도 있었구나 하는 너무나 대조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척족의 발호가 왕조의 조락을 재촉했고 일신의 부귀에 눈이 어두웠던 권문세가들의 작태를 읽게 되면 한스런 마음이 곧장 분노감으로 치달리게 된다. 일본의 간교한 침탈이 목전에 다다랐고, 청국의 노회한 술책이 사직을 기롱하고 있었는데도 어느 벼슬아치 한사람 당당히 나라를 위해 일신을 투척한 이가 없었으니 탕조의 멸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록 신진기예의 2O전후 청년들에 의해 삼백대하의 움직임이 있었다해도 그것 또한 일본의 힘을 빌어 그것을 계산해 치러진 일이고 보면 우울한 마음은 풀 길이 없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잘 되기를 바라서 스스로 손해까지 자담할 의리있는 이웃 나라가 아닌 것 쯤은 그때도 알았어야 했으니 말이다.「삼일 천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 뒤 일본의 침탈이 오히려 그만큼 더 빨리 다가오지 않았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 험난한 시절에 지도자로 나섰던 인사들은 걸핏하면 종묘사직을 논의하고 종??애국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외국에 붙어 줏대없는 태도를 보이기 예사였다. 국왕까지도 남의 나라 공관으로 파천시켰던 친노파가 있었는가 하면, 뻔질나게 서양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신식 학예를 본받겠다고 설쳐댔던 친미파도 있었으니 친일파가 생긴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이들 외세 추종자들은 서양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던 정동을 마치 서양문명의 학습지로 여기며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이들을 가리켜 정동파인사들 이라고 불렀다.
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외국공사관의 이국적 품정에 취해 백인들과 함께 코피를 마시고,몇 마디 짧은 서양말을 쓰면서 서양인의 몸짓까지도 서투르게 흉내냈던 정동파인사들은 곧 그 시대의 자칭 애국자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애국의 방법이나 구국의 방략은 서양의 힘을 빌어 나라를 지키려는 것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한심한 작태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서양이, 특히 한반도에 진출했던 서양이 제국주의시대에 가장 앞장섰던 선두 세력이었음을 생각할 때 마치 고양
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같았다. 이들 정동파 인사들은 서양의 공사관을 드나들면서 나라의 큰 일이나 작은 일을 하나도 가리지 않고 서양인들에게 귀옛말로 전해 주었으니 외세의존의 속물 그 자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정동파 인사들의 이러한 작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던 인물을 아쉽게나마 떠올릴수 있음을 그나마 민족의 역사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그 분이 바로 부산의 왜학 훈도 안동준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기 위해 온갖 구실을 찾고 있었던 고봉주년기에 대일외교의 최일선 창구를 맡았던 분이 바로 안동준이었고, 그 분의 정확한 사태판단과 의연한 결단력은 일본의 침탈을 그만큼 지체시킬 수 있었다. 민비가 자신의 소생으로 하여금 청국으로부터 세자 책봉승인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을 때, 특히 일본외교관에게 부탁해 청국의 승인을 얻으려는 의도로 그 일본의 교관에게 이권양여의 밀약까지 했을 때, 안동준은 분연히 민당의 잘못된 행위를 탄핵하고 나섰다.
외국과의 외교관계란 반드시 대등적이고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때라도 비굴함을 보이거나 약점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하게 되면 뒷날 나라의 체모를 지킬 수도 없거니와 심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고 주장했던 안동준 이야말로 그 시대 민족주의의 선구자라해도 좋을것 같다. 안동준의 이러한 주장은 민비척족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고있었던 시대였기에 당연히 박해를 각오한 결연한 행동이었다.
안동준의 그러한 주장은 결국 그 자신을 동래부의 형장에 서게 했으며 효수형의 참혹한 형벌로 그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형벌이 그만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음은 비극의 역사 때문만이 아닌 것 같다.
정동파인사들이 애국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을 잊어버린 채 궁극적으로 일신의 영달에만 치달았던 비극적인 사례를 우리는 이완용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도 그 당시에는 애국을 내세우면서 열심히 정동을 드나들었던 정동파인사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1백여년 전에 있었던 그 정동파 인사들의 작태가 오늘의 우리들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기우감은 안동준의 그 당당했던 민족의 열정을 떠올림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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