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기전의 순수함을 동경|바스콘셀로스작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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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간은 슬픔을 통해 철이 든다. 철 들기 전의 슬픔은 거짓 슬픔이거나 대수롭지 않은 슬픔이다. 슬픔은 개인과 세계 (혹은 비개인) 의 충돌에서 개인이 패배할 때 오는 감정이다. 인간은 세계가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완강한 타인임을 깨닫게 되면서 세계와 타협한다. 타협, 즉 철이 드는 대가로 그는 환상을 박탈당하고 만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바로 한 어린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리고 마는 「비극적 통과 제의」를 그린 「바스콘셀로스」의 자전적 동화풍 소설이다.
놀랄 만큼 감수성이 예민한 악동 「제제」는 그의 형 「토토카」의 표현을 빌면 「악마의 피가 흐르는 놈」인 동시에 「뱀 같은 녀석」이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 순수하다. 그런 「제제」가 가난뱅이 아버지보다 더욱 사랑했던 「포르투가」아저씨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비극적 세계에 눈뜬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제제」역시 「사랑의 파멸」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슬픔」을 만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라임오렌지 나무가 그 때 꽃을 피운 것을 보게 된다. 꽃은 곧 「철듦」이다. 그는 라임오렌지 나무를 기억 속에서 죽인다.「제제」는 이제 철든 세계로 떠나야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악동이 될 수 없다. 그는 너무 빨리 유년 시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감동은 「철듦」에 있지 않다. 반대로 「철들기 전의 세계」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에 있다. 선악이 부재하는 환상의 나라, 오렌지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상상의 왕국,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땅. 그곳에서는 가난도 눈물도 아름답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곧 양식이며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곧 풍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유년 시절을 떠난 사람은 다시 그곳에 갈 수 없다. 철든 사람들은 이미 사물에 대한 사랑도 상상력도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결국이 책의 감동은 「실지 회복의 기쁨」 에서 온다. 망각 저편에 있는 유년 시절의 순수함이 전속력을 다해 달려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책은 78년, 지금은 없어진 광민사에서 출간됐다. 그후 D·K·M출판사 등이 다투어 번역, 지금까지 십여종이 나왔고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다.
10년 가까이 베스트 셀러가 됐고 지난 해부터 갑자기 소설 부문의 정상을 다투는 「이상한 책」이 되어버렸다. 몇몇 중·고등학교의 추천 도서로 선정되면서 끊임없이 창출되는 청소년 층의 독서 수요만으로는 그러나 이 책의 마력을 설명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때 「제제」와 같은 어린이였다는 사실이다.
68년 발표해 브라질 전역에서 50만 부가 팔려나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로 브라질 최고의 작가로 떠오른「조제·마우로·데·바스콘셀로스」는 1920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비참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모든 소년들을 「포르투가」아저씨가 그랬듯이 사랑했다. 85년 그는 죽었다. <기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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