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자가 민주주의 성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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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28면

똑똑한 지도자(明君)가 이끄는 선한 정부는 누구나 바라는 이상일 것이다. 유교(儒敎)도 덕(德)을 베푸는 선한 정치가 이상이다. 선한 엘리트가 몽매한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반대로 시민이 선하다고 한다.


유교의 딜레마는 통치자가 선하면 국민이 우매해진다는 데 있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 틀에서는 선출한 정부가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중우(衆愚)정치일 수 있고, 관료주의 덫에도 빠지기도 한다. 미국 대선에서 보듯 아직도 민주와 엘리트주의가 대립하는 양상이다.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性理學)은 극단적 엘리트관료주의였다. 성리학은 타고난 자질(氣質)에 따라 지적 능력이 달라진다고 한다. 자질에 따라 성적이 나뉜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개별적 차이로 보아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능으로 인간의 가치와 선악(善惡)을 나누는 성리학은 문제다.


약 80만자의 경전(經典). 조선에서 관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과거(科擧)시험은 극단적인 외우기였다. 선함이 책에 있는 게 아니고, 외운다고 선해지는 건 아니지만 외워야 할 경전 내용이 선(善)이다. 선을 외워 과거에 급제한 관리는 선의 전문가다. 따라서 조선에서 정부란 ‘밝은 덕(明德)’을 베풀고, ‘백성을 새롭게(新民)’ 이끌어 ‘최고로 착하게(至善)’ 만드는 선한 목자 집단이었다.


정부의 책무란 ‘어린(愚昧)’ 백성을 밝은 빛으로 계도하는 일이다. 언제나 정부가 옳기에 백성은 무조건 따라야 했고, 몽매(蒙昧)한 백성은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은 악(惡)이다.


그렇게 정부가 선하면 백성은 우매해지고, 정부가 밝으면 백성은 어둠이 되는 것이다. 이게 착한 정부의 딜레마다.


민주주의는 반대로 국민의 의지가 선이고 정부는 도구다. 따라서 뛰어난 지도자보다 국민의 의견을 투명하고 원활하게 실행할 시스템을 중시한다. 민주 지도자는 선한 목자보다 국민의 뜻을 헤아리고 머리를 맞댈 줄 아는 사람이 적합하다. 정부의 선이란 국민과의 소통과 효과적인 업무처리에 달렸다. 민주정부에선 불통(不通)이 악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니 모두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잡음과 갈등을 드러내고 이해를 조절해 나가는 제도라 그렇다. 트럼프로 인해 정책 방향은 변하겠지만 미국을 지탱하는 시스템은 건재하다. 때문에 다음날로 시장은 정상을 되찾았다.


우리의 수능을 비롯한 국가고시는 과거제 조선과 닮았다. 의식은 조선이지만 겉만 민주주의다.


권좌에 앉은 이는 자신만이 선하다고 우기며 불통의 벽을 쌓는다. 자신이 옳다며 계도와 계몽만 주장한다. 조선의 잔재를 털어내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요원한지 모른다. 명군을 바라는가? 민주주의의 성군(聖君)은 선한 자가 아니다. 소통하는 자다.


이호영 현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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