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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시 108편에 담은 "사색과 고뇌"|김초혜 시집『사랑 굿』|정효구<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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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를/고집하여/생긴/병입니다/그립자만 걷는/이 길은/멀어/끝없는 길입니다/뜻하는 길로/가지지도 않고/가로질러/갈 수 없는/얼굴이/자신에게/안 보이는/길입니다.』<사랑 굿 108> 시집『사랑 굿』의 시인 김초혜 씨가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23년 전 그가 대학 2학년 때인 1964년이다. 데뷔 이후 20여 년이라는 두터운 침묵의 표피를 깨뜨리고 첫 시집 『떠돌이 별』을 출간했을 때 우리는 반가움과 경이로움으로 그의 시집을 향하여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첫 시집을 출간한 이후 1, 2년 간격으로『사랑 굿 1』과『사랑 굿 2』라는 시집을 출간하는가 했더니 이 두 권의 시집으로 인하여 그의 시제는 보다 화려하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20여 년간이나 떠돌이별처럼 어둠 속에서 부유하던 그의 영혼은 이제 본격적으로 굿판을 벌이고 제자리를 찾아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일까. 1백8편으로 구성된『사랑 굿』연작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신들린 무당처럼 사망의 굿판 한복판에서 진지하고도 열띤 자세로 창조적인 작업에 몰두해 있음을 보게 된다.『김 선배님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은박지 같다 고나 할까요』
모 소설가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적절한 비유가 김초혜 씨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은박지 같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은박지란 반짝임과 유연함과 불변함을 그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리라. 작품 속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일상적 삶 속에서도 김초혜 씨의 언어는 놀랄 만한 재기를 담고 반짝거린다. 그런가 하면 그의 언어는 부드러움의 자장 속에 불변의 내밀한 뜻을 담고 있다.
시집 『사랑 굿』의 숨은 비밀을 은밀히 탐색해 보려고『작품 속의「그대」는 누구입니까』『왜 시집의 제목을「사랑 굿」이라고 했습니까』『108은 상징적인 숫자입니까』등등 귀찮은 질문공세를 펴면 그는 지난날 20여 년 동안 지켰던 침묵만큼이나 무겁게 입을 다문다. 모든 것은 독자의 감성과 상상력에 맡기겠다는 태도다.
『사랑 굿』이 보여주는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구나 사색하고 고뇌해야 할 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깊이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고 황량한 생활의 전선을 맹수처럼 포효하며 뛰어다니는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문득 고요한 자리로 되돌아와 명상의 공간을 즐기고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혼신을 기울여 형상화하고자 한 것은 바로 후자와 같은 명상과 성찰의 공간을 마련해 보고자 한 것이며 고통을 사랑으로 감싸안음으로써 이른바 사유하는 인간의 어려움과 아름다음을 진솔하게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구심적인 수렴의 긴장감을 내장시키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심력이 어느새 확산의 원심 적 방향으로 세력을 넓혀 간다는 것이다.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만남이 싫어 아니라/떠남을/두려워함인 것을 압니다』(사랑 굿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초혜 씨의『사랑 굿』은 나와 그대의 관계 속에 무한의 사랑을 들어부음으로써 살아가는 일의 참뜻을 깨우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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