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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씨 누님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북한 탈출 김만철씨의 큰누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다시는 못 만나고 죽을 줄만 알았는데 살아서 동생을 만나다니 꿈만 같구만이라우.』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벅차 어쩔줄 모르는 콘 누나 김재선씨(66·서울 응암동 91의9)는 『어서 빨리 동생을 만나 한맺힌 혈육의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동생 이름이 나왔고 직업도 의사인 것이 아버지 대를 이은 것 같아 혹시나 하면서도 둘째아들이 「외삼촌 같다」고 할 때는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이제야 나오겠느냐」고 믿지 않았어요. TV서 보고 전남광산에 누나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동생인줄 알았지라우.』
김씨는 그래도 못미더워 동생과 나이가 비슷해 어려서함께 자란 둘째아들(정경복·44)에게 전남 함평 시골집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 『외삼촌이 틀림없다』는 재차 답변을 듣고 동생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김씨는『찬찬히 볼수록 갸름한 얼굴 윤곽하며 눈매·입매에 옛모습이 되살아난다』고 말하며 감회에 젖었다.
『그토록 무서운 감시를 피해 탈출한 것을 보면 얼마나 고향에 오고 싶었겠는지, 탈출하면서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눈시울을 적신 금씨는 동생을 만나면 『아버지·동생소식부터 묻고 싶다』고 조바심했다.
김씨 남매가 헤어진 것은 지금부터 43년전인 1944년.
치과기공사였던 김씨 남매의 아버지 김만춘씨(호적 이름 김정규)는 그 2년전에 부인(배점선씨)을 잃고 이빨보철영업도 잘 안되자 고향인 전남 광산에서 멀리 함북 청진으로 가족을 이끌고 이주했다. 함평으로 시집 보낸 맏딸 재선씨를 뺀 9남매중 8남매가 모두 아버지를 따라 북으로 갔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60전후였을 것이라고 김씨는 기억했다.
3남6녀인 김씨 형제는 재선씨가 장녀로 맨위였고 그 밑으로 재복(61·여)·애월(59·여)·만술(57)·까막네(55·여)·만선(53)·삼순(51·여)·만철(46).
그리고 맨밑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여동생이 있었고 일곱째 만철씨는 그때 7살쯤이었던 것으로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광산의 호적에는 김씨 형제가 3남7녀 10남매로 등재돼 있었으며 만철이란 이름은 없었다.
북으로 간 친정집과는 해방전까지 여러차례 편지 왕래가 있었고 큰남동생 만술씨는 한차례 고향과 누나집을 다녀가기도 했었다. 이듬해 해방이 됐고 38선 분단과 함께 김씨는 친정과 소식이 단절됐다.
함평에서 농사를 짓는 정점옥씨(77년 68세로 사망)와 결혼, 아들만 7형제를 둔 누나 김씨는 6·25 때도 친정소식은 못 들었고 나이가 들면서 살아 생전에는 친정 식구들을 못 보리라 체념했다.
7형제중 6형제를 장가들이고 대학(서울세종대)에 다니는 막내아들 경채군(29)시중을 위해 3년전 서울로와 네째아들 경택씨(36·부동산)집 이웃에 방을 얻어 막내아들과 살고있는 김씨는 8일밤 전남 함평군 엄다면 송로리 시골서 농사를 짓고 있는 장남 경렬씨(49) 차남 경복씨는 물론 친정 고향마을인 전남 광산군 비아면 비아리4촌·6촌 남매들과도 전화로 감회를 나누며 꿈만 같은 남매 상봉에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김씨는『죽었던 동생이 가족까지 데리고 살아 돌아 온 셈이니 다시는 헤어지지 말고 이웃에서 오순도순 살고싶다』고 소망을 말했다.
김씨의 세째아들 정기섭씨(39)는 『어머니가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밤늦게까지 혼자 시청하며 눈물을 흘리셨는데 이제 외삼촌을 만나시게 됐으니 평생 한 한가지를 푸신 셈』이라며 전남 함평 시골집에서 방송을 듣고 몰려온 동네사람들과 얘기꽃을 피웠다.<최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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