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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울먹였지만 권력 미련 못 버린 대통령 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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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허탈과 분노, 불안에 휩싸인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안 됐다. 담화가 시작될 때만 해도 기대는 있었다. 최순실이란 무녀(巫女)풍의 한 여인이 청와대, 정부, 대기업 등을 제 집 안방처럼 헤집고 돌아다니며 온갖 권력과 축재를 만끽한 희대의 국정 농단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마비 상태이고 국회에선 대통령의 2선 후퇴 요구가 나오고 광장에선 하야 소리가 난무하는데 그 원인 제공자인 박 대통령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서 굿 안 해” 같은 방어적 내용
김병준 관련 언급 없어…국민 실망·허탈
만사 제치고 ‘2선 후퇴’해야 실마리 풀려

대통령의 담화는 그러나 검찰 수사를 의식한 방어적 내용으로 가득 찼다. 최순실에 대해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움받았고 이 때문에 왕래하게 됐다”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고 엄격하지 못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선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줄 수 있다며 따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못하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검찰 수사와 직접 관계없는 문제들까지 도매금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대신 박 대통령은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얘기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와 같이 자기 변호에 필요한 말은 성실하게 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담화는 국민의 감동은커녕 실망과 허탈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애초부터 기자회견이 아니라 일방적인 담화 형식을 취한 것부터 국민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물론 대통령의 울먹이며 참회하는 감성적 호소는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를 피하지 않고 특검까지 받겠으며 어떤 책임도 질 각오가 돼 있다는 언급은 고심 끝에 나온 것으로 그 자체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담화는 정치 상황을 더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우선 전날 김병준 총리 후보자가 공개적으로 밝혔던 대통령의 새누리당 탈당 가능성, 내치(內治) 전권을 부여받았다는 주장, 개각은 여야·국회와 협의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담화가 끝난 뒤 청와대 관계자가 “김 총리 후보자의 발언이 곧 대통령의 뜻”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김 총리 후보자의 말은 대통령의 권한 행사와 직결된 중대 사안인 만큼 반드시 박 대통령이 직접 확인해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정치의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는 김 총리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하고 국회에 총리 지명권을 넘기라고 했는데 박 대통령은 일언반구 답하지 않았다. 이런 중요하고도 시급한 정치 현안을 생략한 채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하다”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아리송한 얘기를 했다. 권력으로 나라를 망쳐놓고 아직도 권력에 미련이 남은 걸까. 박 대통령이 만사 제쳐놓고 국정 운영의 2선으로 후퇴해야 나라를 구출할 희미한 실마리라도 잡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