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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한번에 1만5100㎞…항공업계, 장거리 직항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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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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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에어인디아, 에티하드항공, 카타르항공, 에미레이트항공 비행기의 꼬리날개.

지난 16일 오전 4시, 인도 델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에어인디아의 보잉777기가 이륙했다. 이 비행기가 약 14시간30분 동안 1만5100㎞를 날아 도착한 목적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날 처음 취항한 이 노선으로 에어인디아는 ‘세계 최장거리 직항을 보유한 항공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에어인디아, 세계 최장 노선 개설
원래 항로 반대로 돌아 1200㎞ 늘어
편서풍 타 비행시간은 2시간 줄어
저유가 지속, 고연비 항공기 한몫
세계 ‘환승허브’ 경쟁도 기름 부어
중동 항공사들, 장거리 톱10 중 6개
싱가포르, 뉴욕행 1만6000㎞ 곧 부활

델리~샌프란시스코 노선 자체는 지난해 말 개설됐다. 최근까지 이 구간에 투입된 비행기들은 서쪽으로 날아 대서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1만3900㎞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에어인디아는 지난달 비행기를 반대편으로 띄우기로 결정했다.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너 1000㎞ 이상을 더 날아 샌프란시스코로 가기로 한 것이다. 왜 항공사는 먼 길을 돌아가기로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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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을 바꾼 뒤 비행시간은 대서양을 건널 때보다 약 2시간 줄어 14시간 남짓이 됐다. 더 멀리 가는데도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비행기와 같은 방향으로 불어 비행기를 밀어주는 ‘뒷바람(tailwind)’ 덕분이다. 에어인디아 측은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고, 바람도 그 방향으로 분다. 서쪽으로 날면 맞바람의 저항을 받고 동쪽으로 날면 뒷바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항공사에 따르면 보통 대서양으로 날 땐 시속 24㎞로 맞바람이, 태평양으로 날 땐 시속 138㎞로 뒷바람이 분다. 계기판상 비행기가 시속 800㎞로 운항한다면 실제 속도(그라운드 스피드)는 각각 시속 776㎞, 시속 938㎞가 된다는 얘기다. 이처럼 바람의 도움을 받도록 노선을 바꾼 덕에 세계 최장거리 노선은 장거리 2~10위인 다른 노선보다 짧은 비행시간을 갖게 됐다. <그래픽 참조>

항공사에 운항시간 단축은 연료 절감을 뜻한다. 에어인디아는 연료비를 아끼면서 세계 최고 타이틀도 얻은 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델리로 돌아가는 에어인디아 항공편은 반대로 대서양을 건너간다. 역시 뒷바람을 받아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올 들어 항공업계는 장거리 노선 경쟁에 불이 붙었다. 장거리 직항 10위 안에 드는 노선 중 에미레이트항공의 두바이~오클랜드(1만4203㎞), 유나이티드항공과 싱가포르항공의 싱가포르~샌프란시스코(1만3595㎞), 카타르항공의 도하~로스앤젤레스(1만3367㎞) 편이 올해 신설됐다. 내년 2월엔 카타르항공이 1만4536㎞ 거리인 도하~오클랜드 노선을 취항할 예정이다. 2018년엔 신기록 등장이 예고돼 있다. 싱가포르항공이 3년 전 폐지했던 싱가포르 창이공항과 뉴욕 뉴어크리버티 공항을 연결하는 직항편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1만6500㎞ 거리에 비행시간은 19시간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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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신설됐던 이 노선은 2013년 말 실적 부진을 이유로 폐지됐다. 당시는 국제유가가 최근 5년 새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을 때다. 연료비가 급격히 오르는데도 항공사 측은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이코노미석을 없애고 비즈니스석으로만 운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석 점유율만 떨어졌다. 당시 항공컨설팅업체 아시아·태평양항공센터(CAPA)는 “기업 이미지는 좋아졌지만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운영해야 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분석했다.

이랬던 항공업계 트렌드가 확 바뀐 건 저유가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항공이 최장거리 노선을 폐지했을 때 서부텍사스유(WTI)는 배럴당 100달러에 육박했다. 현재(지난 27일 49.72달러)의 2배 수준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한 번 이착륙해 멀리 날아가는 노선이 중·단거리보다 저유가의 혜택을 크게 볼 수 있다.

연료 효율이 높은 차세대 항공기가 등장한 것도 한몫했다. 유나이티드항공이 싱가포르~샌프란시스코 구간에 투입한 보잉사의 ‘드림라이너 787-9’는 가벼운 첨단 소재로 기체를 만들어 기존 항공기보다 에너지 효율을 20% 높인 기종이다. 싱가포르항공의 싱가포르~뉴욕 구간에도 신규 도입되는 에어버스사의 A350-900ULR(Long Range version)이 투입될 예정이다. 이 역시 비슷한 크기의 보잉 777-200LR보다 약 25% 연료 소비를 줄인 고효율 기종이다.

초장거리 노선 확대를 주도하는 것은 중동 항공사들이다. 운항 거리 10위 안에 드는 노선 중 6개를 에미레이트·에티하드·카타르 등 중동 항공사가 보유하고 있다. 카타르 항공은 이달 초에도 보잉사와 180억 달러(약 20조5000억원) 규모의 여객기 100대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엔 에너지 고효율 기종인 드림라이너 777·787 기종 40대가 포함됐다. 카타르항공 그룹의 아크바르 알바커 최고경영자(CEO)는 “새 항공기들은 네트워크 확장에 투입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거리 직항 노선을 더 신설하겠다는 얘기다.

중동 항공사들이 경쟁적으로 장거리 운항에 나서는 건 허브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중동은 남미 대륙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지구상 어디와도 1만5000㎞ 이상 떨어져 있지 않다. 웬만하면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도착할 수 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을 지녔기 때문에 장거리 노선을 보유할 경우 대륙 간 환승 허브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 이미 에미레이트·에티하드·카타르항공의 거점 공항인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아부다비, 카타르의 도하는 전통적인 허브 공항인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넘어서는 수준이 됐다.

지난 6월 싱가포르의 스트레이트타임스는 창이항공의 위상을 우려하는 기사에서 “두바이·아부다비·도하의 공항 이용객 90%는 유럽이나 미국이 최종 목적지인 환승객”이라고 보도했다. 싱가포르항공이 과거 싱가포르~뉴욕 직항 노선을 활용해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을 오가는 고객을 흡수했던 것처럼 중동 항공사들이 장거리 노선으로 승객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어인디아가 델리~샌프란시스코 노선을 취항한 것도 인도와 실리콘밸리를 오가는 정보기술(IT) 업계 승객을 흡수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싱가포르항공이 최장거리 직항 노선을 부활하는 것 역시 과거의 영광은 물론 승객을 되찾겠다는 의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한국에서 출발하는 최장거리 직항은 대한항공이 운항하는 인천~애틀랜타 노선이다. 운항거리는 1만1487㎞로 약 15시간이 소요된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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