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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명창' 안숙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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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럴 줄 내 몰랐다. 아서라 내가 시러배 아들놈이지. 현철허신 곽씨도 죽고 살고 출천대효 내딸 청이도 생죽음을 당했는디 지까짓년을 생각하는 내가 미친 놈이로구나."

지난 26일 서울 역삼동 국립영상제작소(KTV. 케이블 Ch 14, 위성 Ch 151) 스튜디오. 평일 오전 9시부터 30분간 방영되는'안숙선의 소리마당'(재방영 토 오후 2~4시, 일 오후 8~10시)의 녹화가 한창이었다. '심청가'중 뺑덕어미 도망간 대목을 배우고 있었다.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안숙선(安淑善.54) 명창이 완창 시범 연주 시리즈(적벽가)와 판소리 교실은 물론 진행까지 맡아 3년째 계속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安명창은 올해도 여름 휴가를 반납한 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9일 뉴욕 링컨센터 페스티벌에서 '춘향가'를 5시간30분 동안 완창한데 이어 오는 8월 17일 같은 작품으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다음달 9일 오후 9시 국립극장 하늘극장(야외무대.6백석)에선 판소리'흥보가'를 완창한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여름밤 별을 보며 남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맞으며 판소리를 즐길 수 있는 가족 문화 나들이 코스다. 지난해 8월 '수궁가'로 '야외 심야 완창'의 첫 테이프를 끊은 安명창이기에 각오가 남다르다.

"옛날 명창들은 주로 마당이나 정자에서 소리를 했어요. 그래서 요즘보다 더 소리가 힘차고 강한 맛이 있었어요. 저도 어릴 때 공터에 확성기 하나 놓고 천막치고 공연 많이 했습니다. 아무데서나 돗자리 깔고 병풍 두르면 그게 무대였죠. 소리가 흩어지는 데다 바람과 습기 때문에 성대가 쉽게 상해 위험 부담이 따르긴 하지만 실내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맛이 있어요. 관객과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다는 점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죠."

외당숙 강도근(1918~96)명창에게 배운 동편제 '흥보가'완창은 이번이 세번째다. 제대로 하려면 다섯 시간 가량 걸리지만 이번엔 관객들의 귀가 시간을 고려해 세시간 내외로 줄였다.

"'흥보가'는 다른 판소리에 비해 재담이 많은 편이죠. 세상사 이치에다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만큼 쉽게 공감할 수 있어요. 울다가 웃기도 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기도 하죠. 듣다보면 속이 후련해지는 대목도 많아요."

녹화가 끝나고 기자와 인터뷰를 끝낸 그는 서둘러 보따리를 싸들고 전남 구례 문수사로 독공(獨工)을 떠났다. 8일 간격으로 '흥보가''춘향가'를 연이어 완창해야 하는 데다 둘 다 한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큰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지리산은 소리의 힘과 자양분을 재충전하는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다. 바람소리.새소리.폭포소리를 벗삼아 잡다한 행사에 몸이 지쳐 흐트러진 소리를 가다듬는 것이다.

86년 '적벽가'를 시작으로 90년까지 판소리 다섯바탕을 완창한 安명창. 남들은 1년에 한번 하기도 힘들다는 완창 무대에 한달 동안 세번이나 설 수 있는 건강 비결은 뭘까.

"좋은 공기 마시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게 최고의 건강법이죠. 이번 뉴욕 공연에서도 쇼핑도 하지 않고 컨디션 조절에 매달렸어요. 센트럴파크에서 두시간씩 산보한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죠. 아무리 아파도 일단 무대에 서면 언제 그랬느냐는듯 절로 힘이 납니다."

링컨센터 페스티벌 얘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지금까진 판소리가 외국 무대에 진출하더라도 우리 돈을 써가면서 공연장을 빌려 전석 초대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번엔 자비(自費)로 마련한 프린지(자유참가) 공연도 아니고 개런티를 받으면서 공식 프로그램에 초청받은 경우죠. 소리하는 사람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영어 자막을 곁들였더니 반응이 매우 좋아요. 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문화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꼈어요."

安명창은 음악가족 출신이다. 어릴 때 이모 강순영 명인에게 가야금을 함께 배운 동생 옥선씨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다. 딸 최영훈(27)씨는 국립창극단 기악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공연 메모=8월 9일 오후 9시 국립극장 하늘극장. 계단 위 마루에 앉아 세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방석을 준비하면 좋다. 전석 2만원. 같은 날 오후 6시30분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선 차세대 명창들의 무대가 열린다. 02-2274-3507.

글=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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