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노·엔릴레 불화 속의 정국 전망|필리핀은 어디로 가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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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닐라=김진국 특파원】『코리』『평화』『민주』.
지난달 30일 메트로 마닐라의 마카티시에는 10여개의 긴 노란 천에 검은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렀다.
그 아래에는 1만5천여명의 시민들이 「아키노」대통령의 신 헌법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아키노」 대통령의 임기를 92년까지로 규정한 신 헌법-. 지난 2월 혁명 이후 비교적 밀월을 즐겨온 「아키노」「엔릴레」의 관계가 10월 초 신 헌법 초안 제출을 계기로 「엔릴레」의 강한 반발을 야기, 급속히 냉각됐다.
공산 반군들과의 평화 협상을 제의하는 등 「아키노」의 좌경 참모들이 국가 안정에 너무 소홀한게 아니냐는 의혹도 많았다.
그러나 「솔라즈」미 하원 아태 소 위원장의 평가처럼 「아키노」는 『필리핀인들의 가슴에 자유를 품게 했고, 20년간의 절망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광명을 자랑스럽게 맞이하게 했다. 또 허약한 정부라는 불안을 씻으려는 듯 만신창이가 된 경제수습, 신 헌법 제정 및 총선 등 정치일정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차근차근 전진해 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러한 필리핀 정국에 지난달 말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지난달 21일 「엔릴레」국방장관이 「아키노」정부와 각료들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연 것이다.
「아키노」정권은 국민의 기대를 외면한 체 합법적인 정권 존립 기반을 상실했으며 따라서「아키노」대통령은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법적 자격을 잃었다』고 비난, 현 정권에 정면도전을 했다.
심지어 이번 주에는 미 타임지와의 회견에서「아키노」는 『86년 2월25일부터 3월25일까지 임기로 선출됐다』는 1개월 대통령 주장까지 내세워 그 정통성까지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한 미국관리는 「엔릴레」의 이러한 반발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신 헌법 초안에는 조급하게 대통령직을 노리는「엔릴레」의 야망을 좌절시키는 조항을 삽입, 「아키노」의 대통령 임기를 1992년까지 인정해 현재 68세인 「엔릴레」가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68세까지 기다려야하게 됐다.
이외에도 「엔릴레」는 ▲공산반군의 평화 협정 ▲좌파 각료 해임 ▲「아키노」가 임명한 임시 지방 관리 문제 등에서 반발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마르코스」밑에서 7년 동안 국방장관을 지낸 그로서는 대통령 사정 위원회의 부정 부패 조사 활동도 감정을 상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아키노」는 『못마땅하지만 필요한』 「엔릴레」를 설득시키기 위해 「엔릴레」의 의견을 일부 수용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 시한 제시 ▲「아키노」가 임명한 지방관리들에 엄격한 기준을 둘 것 등을 약속했다.
지난 10월말 마닐라에는 며칠사이 3건의 폭발사고가 발생, 「엔릴레」의 입장을 강화해 주는 듯했다. 이 폭발사고를 놓고 언론들은 「마르코스」전 대통령 추종자의 짓, NPA의 소행 등 엇갈린 보도를 했으나 「엔릴레」추종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의심도 상당했다.
또 일부 시민들은 이것이 1972년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내리기 전과 흡사한 상황이라는데 깊은 우려를 했다. 특히 『나를 해임하면 나는 물러난다. 그러나 나는 먼저 군부와 상의할 것』이라는 「엔릴레」의 경고는 쿠데타의 위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부 관측통들은 「엔릴레」가 아직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은 군부의 불만을 충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필리핀 정부의 분열이 심해지고 쿠데타설까지 떠돌게되자 미국은 즉각 「아키노」에 대한 「완전하고 명백한」지지를 표명했다.
이것은 「아키노」의 신 헌법이 반미·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하던 「엔릴레」로서는 충격이었다.
미군 기지 문제, 필리핀의 비핵 지대화 문제 등으로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엔릴레」는 그 불만으로 미국에 내정 간섭하지 말라고 공격했고 미국은 「엔릴레」의 미국 내 부정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발표, 「엔릴레」에게 다시 압력을 가했다.
필리핀의 정신적지주인 「신」추기경도 3일 「아키노」-「엔릴레」의 불화가 너무 감정에 치우치고 있다며 화해를 종용하고 모든 가톨릭 신도는 신 헌법을 지지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키노」로서 「엔릴레」가 두려운 것은 군부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라모스」참모 총장이 군의 정치 개입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 군부의 안정이 유지될 경우, 현재 70%의 찬성이 예상되는 신 헌법의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국민투표까지의 민주화 과정에 군부의 태도가 필리핀 민주주의의 길을 나누는 주요변수로 남아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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