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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그냥 돌진해야 할 때도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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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14면

페니 플래그

‘상남자’나 ‘천상여자’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를 각자의 성적 굴레 안에 가두어 놓는 표현이다. 완전한 여성성만을 가진 사람도 없고, 지독한 남성성으로만 무장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타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낄 때는 여성 속에서 뜻밖의 남성성을 발견하거나 남성 속에서 의외의 여성성을 발견할 때다.


칼 구스타프 융은 남성 안의 여성적 무의식을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적 무의식을 ‘아니무스’라 각각 명명했다. 그리고 남녀가 서로 그 반대편의 무의식을 조화롭게 공유할 때,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남성에게 스포츠나 전쟁에 대한 관심만을 유도하고 여성에게 살림이나 미용만 강요하는 세상은 남성의 아니마와 여성의 아니무스를 억압하는 굴레인 셈이다. 21세기에도 남자아이에게는 로봇과 ‘파란 유모차’를, 여자아이에게는 금발미인 인형과 ‘분홍색 원피스’를 권유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로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짓누르는 사회의 집단적 보수성인 것이다.


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접하면서 ‘내 안의 아니무스’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틀 지워진 가치들을 수없이 내면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인형의 집’이 갖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고, 인형처럼 예쁜 얼굴을 가진 소녀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심 더욱 부러운 것은 아무렇게나 동가식서가숙하며 세계여행을 다녀도 좋은 남자들의 자유였다. 남자들은 애써 싸우지도 않고 그런 자유를 얻다니! 우리는 집을 나가 독립하는 것도, 배낭여행 한 번 가는 것도, 심지어 늦은 밤에 혼자 택시를 타는 것마저 모두 힘든 투쟁이고 두려운 모험인데. 남자로 태어났다면 내가 조심해야 하는 모든 것들, 조마조마해야 하는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여성의 억압된 아니무스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아니무스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여성에게 억압된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긍정적으로 발휘되었을 때는 좀 더 결단력 있고, 과감하며, 추진력 있는 쪽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발휘되었을 때는 오히려 일부 남성들 못지않게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권력 지향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내 안의 불타는 아니무스를 만나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내게 아니무스가 가장 이상적으로 발현된 유토피아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에벌린은 아니무스, 그러니까 결단력이나 추진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로 나온다. 에벌린은 인생에서 한 번도 진정한 주도권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행실이 나쁜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순결을 지키고,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오르가슴을 연기하기까지 했다. 아이를 낳은 것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괴짜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나쁜 년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남편에게 바가지 한 번 긁지 않았다. 그런 에벌린의 유일한 위안은 사탕과 초콜릿이었다. 그러다 보니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고, ‘세상과 나’를 잇는 끈들은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런 출구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에벌린은 양로원에 문병 갔다가 80대 노부인 니니를 만난다. 니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인과 흑인이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조차 할 수 없었던 1920년대 미국의 남부. 아마존의 여전사처럼 용맹스러운 이지 드레드굿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사랑을 베푸는 살아 있는 천사 같은 루스와 함께 ‘휘슬 스탑 카페’를 운영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처럼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요리를 파는 소박한 카페였지만, 그곳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유일한 안식처였고, 인종차별도 남녀차별도 없는 지상의 작은 유토피아였다.


그들이 합심하여 ‘휘슬 스탑 까페’를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를 마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이야기처럼 구성지고 맛깔나게 엮어 내는 니니의 모습에 에블린은 점점 빠져들게 된다. 에블린은 선머슴 같은 이지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루스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 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자신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용기를 내 본다. 니니 할머니의 조언에 따라 직업도 갖고 용감하게 사회생활도 해보며, 무력하게 집에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로서의 우울을 떨쳐 버리게 된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더이상 고민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이지와 루스의 이야기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오직 ‘기도하는 것’에서 위로를 찾았던, 연약하다 못해 수동적인 루스가 무슨 일이든 반드시 자기 힘으로 해 내는 이지를 통해 ‘잃어버린 아니무스’를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사랑하는 오빠 버디가 열차 사고로 죽은 뒤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던 이지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자비를 잃지 않는 루스를 통해 ‘잃어버린 아니마’를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스는 이지에게 ‘사랑하는 오빠 버디’를 잃어버린 것은 이지 혼자만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족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버디를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오빠가 죽은 뒤 마음을 잡지 못하고 길 잃은 야생마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지를 모두가 걱정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렇게 루스는 ‘타인을 향한 무한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아니마의 본질을 선머슴 이지에게서 이끌어낸다.


한편 남편에게 구타를 당해도, 어머니가 피를 토하며 “차라리 나를 죽여다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저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기도만 했던 루스에게, 이지는 ‘오직 몸으로 행동해야만 삶은 바뀔 수 있다’는 아니무스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아무리 힘든 일에도 그저 무력하게 기도만 하던 루스는 이지를 통해 ‘행동의 힘’을 깨닫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든 말든 오직 자기 갈 길만 가던 이지는 루스를 통해 ‘사랑의 힘’을 깨닫는다. 이지는 루스로 인해 ‘사려깊은 사랑’을, 루스는 이지를 통해 때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돌진해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운다.


작가가 직접 참여해 원작소설을 각색한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는 이지는 자기 안의 아니무스를 끌어낼 때마다 “투완다!”라는 주문을 외운다. 아마존의 여전사 투완다의 이름을 외치며 용기를 내는 것이다. 에블린 역할을 맡았던 캐시 베이츠가 자신의 외모와 자신 없는 행동을 비웃으며 주차 자리를 빼앗아간 여자들의 자동차를 몇 번이나 들이받으며 ‘투완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언제 봐도 통쾌하다. 평생 부모의 그림자, 남편의 그림자, 자식의 그림자로만 살아왔던 한 여자가 자기 안의 강력한 아니무스를 발견하는, 진정한 깨어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초인적인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이지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본다. 너무 여기저기 배려하느라 아무에게도 거절할 수 없다면, 내 안의 ‘투완다’를 불러 보는 건 어떨까? 아마존의 여전사 투완다처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이지처럼,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오직 떨쳐 일어나 돌진해야만 할 때가 있으니. ●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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