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시지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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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A·토인비」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 대사학자는『앗시지의 성「프란체스코」』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 성인이 묻힌 앗시지(이탈리아의 중부)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27일 로마교황「요한·바오로」2세를 비롯한 1백50여명의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평화를 기원했다. 종파와 교리가 각기 다른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자국어로 각기 다른 신에게 평화를 빌었다. 이런 행사가 한자리에서 열린 것은 세계종교사상 없던 일이다.
이 행사는 원래 로마교황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앗시지시는「프란체스코」성인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8백여 년 전인 1182년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모직물 상인이었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프란체스코」로 지은 데는 까닭이 있다.「프랑스산 모직물」처럼 따뜻하고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청년시절 기사가 되어 전쟁터에도 나갔다. 그러나 적군에 붙잡혀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생활을 하는 중에 하루는 성당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때 십자가상에서 이상한 음성이 들렸다.「프란체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내 집을 고쳐라.』
「프란체스코」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말(마)을 팔고, 아버지의 상점에 있는 옷가지를 팔아 성 다미아노 성당의 사제에게 바쳤다.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가 대노해서 그를 꾸짖자「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옷을 몽땅 벗어 아버지 발 앞에 놓고 말했다.
『저는 하늘의 아버지를 위해 살렵니다.』
그날부터「프란체스코」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청빈한 수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 25세.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옷을 보면 누더기 두루마기 그대로다. 그밖에 가죽신 한 켤레가 그의 재산 전부였다.
그는 거지와 함께, 때로는 나환자와 함께 살았다. 그를 따르는 수도자들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사람만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 생물, 무생물을 자신의 형제·자매로 여기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다.
그는 토끼와 매미와 산비둘기, 당나귀와도 얘기를 주고받았다. 물(수)도 자매고, 불도 형제라고 했다.
만년에 눈병이 나서 외과의가 화 젓가락으로 지지려 하자『불도 형제인데 좀 친절히 다루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느님이 만든 모든 것-,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로마교황「이노센트」3세의 윤허를 받아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클라라 여자수도회도 만들었다.
평화의 시작은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한은 평화의 끝이 없다.
바로 그 평화에 굶주린 오늘의 세계에서 세계 종교인들이 올린 평화의 기도에 세계 지도자들은 얼마나 귀를 기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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