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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국의 인상 준다 소 사진 찍지 말자"|최근 평양 다녀 온 불 기자의 「북한 기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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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파리=홍성호특파원】
『외부세계와 단절된 북한의 도시들도 마치 묘지처럼 정적이 감돈다. 인간들은 마치 기계처럼 박자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최근 프랑스 공산당 대표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프랑스의 사진기자「얀·레이마」 (23) 는 북한의 인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다음은 서독 슈테른지에 기고한 「레이마」 기자의 북한인상기를 요약한 것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프랑스공산당 기자단」. 나와 단 2명을 이렇게 그들은 불렀다. 북경체재 9개월 째인 나는 공산당원이 아닌데도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외국인은 평상 평양에 가려면 항공기를 이용하도록 돼있으나 우리에게는 열차여행이 허용됐다. 북경을 출발한 열차를 타며 우리는 북한령 내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북한에서 온 객차 2량이 따로 마련돼 이 열차간에는 북한승무원과 2명의 비무장 군인들이 동승했다.
국경 역인 신의주에서 열차는 한시간 정차했다. 평양으로 여행하는 승객 3백∼4백 명이 플랫폼에 서 있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수백 명의 군인들이 행진해 들어오고 있다.
승객들도 줄을 지어 승차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람도, 옆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없다. 어린이들조차 인형처럼 뻣뻣하게 서 있다.
평양역에는 당에서 2명의 조그만 소녀를 보냈다. 오른손을 들어 경례를 붙이며 줄줄이 왼 거북한 프랑스말로 우리를 환영한다고 했다.
소녀 뒤에 섰던 남자 둘이 여권을 달라며 우리가방을 집어든다. 우리가 걸어가겠다니까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가야한다고 우겼다. 1백50m거리의 호텔까지 우리를 위해 벤츠와 볼브 승용차가 준비돼 있었다.
고려호텔-. 85년 김일성의 생일날을 기념해 세워졌다는45층 짜리 객실 8백 개의 이 호텔에 든 손님은 우리를 포함, 모두 12명 뿐 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들의 첫 번째 임무는 대외 문화연락부 간부를 만나는 일이었다. 우리일행 13명이 각기 그들의 말을 듣는 데만 한나절이 다갔다.
이 말이 끝난 뒤 안내인 한 명이 『사진기자 동무, 아침식사는 몇 시에 할거요?』 라고 물었다. 몇 시에 식사하느냐고 묻다니? 게다가 8시30분? 9시? 냐고 묻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9시 12분』 이라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9시12분 47번 테이블이요』 라고 그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9시30분에 식당에 나타나니 웨이터가 못마땅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본다.
축구장 절반 만한 크기의 식당에 손님은 우리들뿐. 식탁은 한가운데에 준비돼 있었다.『다른 테이블에 앉을 수 없을까요?』 내가 말했더니 웨이터는 『여러분 테이블은 여기입니다. 47번 테이블, 9시12분입니다』 고 말했다.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 심지어 자연현상까지 통제하고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잔디밭이나 길바닥에 떨어지면 사람들이 달려와 이 「이물질」을 줍는다.
나는 호텔창문을 통해 나뭇잎 사냥꾼을 내려다 볼 수도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 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우리들의 안내자는 무척이나 우리들의 건강에 대해 걱정을 해주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여행으로 아주 피곤 하실테니까요. 더구나 여러분은 낯선 나라에 왔으니까 밖에 나갔다가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지 않소』
그들 몰래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옆방에 자리잡고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우리들도 두 차례 외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평양에는 그 동안 열 두어 개의
중급식당이 생겼고 바도 세군 데나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것이 1백50만 인구의 도시에서 밤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혼자 행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진촬영도 기념비·구호·새로 지은 건물 텅 빈 거리는 허용되었지만 그 외의 것은 못 찍게 하였다
밭을 갈고 있는 트랙터 옆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여남은 마리의 소가 있는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도 못 찍게 했다. 근대화되고 있는 북한에는 소가 풀을 뜯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얘기였다.『왜 그런 것을 찍으러 하오? 사진기자 동무. 당신은 허위를 퍼뜨리려는 것이요?』라는 것이 안내자의 말이었다.
김일성의 얼굴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따라다녔다. 어느 도시를 가나 김일성은 우리를 내려다보았고 어느 가정이고 호텔 방에까지 그의 사진이 걸려 있어 잠자리에까지 우리를 따라다녔다.
호텔 방에서는 침대발치 바로 위에 그의 초상화를 붙여놓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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