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대만서 추앙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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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고구려국의 혁명아」 연개소문(?∼657) 이 멀리 이국땅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대만에서 현재 그의 일대기가 국극 (경극)으로 남아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만의 경극극장엔 연개소문의 가면과 복식들이 보관돼있다고 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최근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가면과 복식 일습을 들여오기 위해 중국대사관측과 교섭을 벌이고있다.
이땅에선 연개소문이란 존재가 적막강산을 이룬지 오래지만 멀리 남의 나라에서 그 숨결이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당시 동아시아전쟁사의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당 태종의 목숨까지 앗아간 그는 중국땅에선 차라리 외경의 존재였다. 많은 전설이 그의 행적을 쫓았으며 전설은 또한 소설을 낳고 소설은 극화됐다. 대만의 경극은 바로 먼 옛날 중국본토에서 놀던 것이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연개소문에 대해 일찌기 주목한 인물은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였다. 단재는 중국대륙을 누비며 그에 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그 중엔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소설 『갓쉰동부』 과 『홍의명전』 도 들어있다.
단재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대륙풍처럼 밀러오는 당세력을 크게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중원땅을 짓밟아 고구려기상을 천하에 드날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남수북진책이 영류왕의 북수남진책과 상충하자 642년「혁명의지」를 관철코자 영류왕을 살해하고 왕질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제왕 이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고구려의 대환은 신라·백제가 아니라 당』 이라며 평소 정당론을 펴온 연개소문은 요수·안시의 양대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뒀다. 특히 동양고대사상 대전쟁인 안건성의 혈전에서 당군은 추풍낙엽이 되고 당태종은 화살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연개소문은 그 길로 당군을 북경까지 추적했다고 한다.
단재는 연개소문의 기사가 국내에선 『삼국사기』 에 겨우『개금 (연개소문) 이 김춘추를 관(초빙)했다』라는 한 줄 뿐임을 통탄했다.
중국측은 당시의 패전기록을 부끄러이 여겨 숨기거나 왜곡했으며 국내의 사대에 찌든 사가들은 이를 그대로 믿고 베껴썼다는 것이다. 더우기 신라 당시엔 연개소문이 백제의 원조자라 하여 미움을 받아 「군을 시해한 적신」「사대주의를 위반한 죄인」으로 핍박, 그에 대한 전설이나 사적을 소멸시키기에 바빴다고 한다.
단재는 『오직 적국인의 붓으로 전한 기록만으로 그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수백년 사대에 찌든 노예사가들이 좁쌀만한 안공에 보이는 대로 그를 혹평, 탄핵함으로써 한시대적인물의 유체를 편육도 남김이 없이 십어댔다』 고 통박한바있다.
한편 박성수교수 (정문연·한국사)는 『중국에서 지금까지 연개소문의 가면극이 전승되고 있음은 당시 중국이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반증』이라면서 『한국고대사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보다 광범한 자료를 수렴할 때』라고 말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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