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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17. 미로 속 그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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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지난 번 비워 놓고 나올 때 그대로였다. 누군가 내 집 현관 패스워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찜찜했지만 쥬디의 계획대로 학생이 다시 내 집에 들어와 폴더폰을 가져가도록 일단 패스워드는 그대로 두었다.

“다 끝났어. 필요한 짐 더 챙겨서 이제 나가자.”

폴더폰을 침실 화장대 위의 충전기에 꽂아 두는 동안 쥬디는 집 안을 대충 둘러보고 침실로 들어왔다.
나는 작은 캐리어를 꺼내 그날 챙기지 못했던 책 몇 권, 그리고 옷가지들과 구두를 챙겼다.

“오늘 밤 그녀석이 폰을 가져가는 걸로 우리 임무는 끝.”

차에 오르며 쥬디가 말했다. 쥬디는 마치 신나는 게임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즐거워보였다. 그는 어떤 일이든 자신의 전부를 털어 넣기보단 한 걸음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놓고 그 만큼의 거리에서 그걸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쥬디의 계획대로라면 폰을 쫓는 무리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만 그건 지금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 착착 진행이 되어야만 가능할 일이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쥬디는 시선을 도로에 둔 채 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바보야. 실패가 어딨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학생이 폰을 가져가서 건넬 때 경찰이 개입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놈들도 몇 차례를 거친 하수인이야. 말 그대로 흔한 깃털이라고. 잡아넣어 봤자 또 다른 사람 시켜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구. 제일 좋은 방법은 원하는 걸 가지고 가게 하는 거야.”

공장초기화를 몇 번이나 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폰에 남겨져 있는 수신번호를 확인하게 된다면 프랑스의 달리미술관에 보관된 에프의 물건이 위험 할 수도 있었다.

“걱정 마. 내가 프랑스에 있는 미술관, 박물관 번호는 죄다 찾아서 주소록에 입력해놨으니까. 전화를 걸어놓은 곳도 수십 군데야. 시차가 있으니 내일 오전에는 그 중 몇 군데서 회신이 올 거고... 돌대가리들이 그걸 알아차리려면 1년은 걸릴 걸.”

쥬디는 마치 내 생각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짜식들... 걸려오는 전화 받으랴 문자 확인하랴 골치 깨나 아플 거야.”

쥬디는 빠른 속도로 달려와 다시 나를 회사 근처에 내려주었다.

“장관 해임 건의안이 줄줄이 올라 와 있어. 요즘 국회가 비상사태야.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해.”

쥬디의 차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쥬디는 그 바쁜 중에도 후배들을 시켜 폴더폰 번호를 인터넷으로 노출시켜 놓았다고 했다. 혹시 그들이 이전의 통화내역이나 주소록을 찾아낼 수도 있으니 되도록 많은 통화기록을 남겨 혼란을 주자는 의도였다.

폰을 충전기에 꽂아 놓고 집을 나오는데 가슴 속에서 미세한 진동 같은 게 느껴졌었다. 에프가 떠나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든 폰이었지만 얼마간 벨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중하게 가지고 다녔던 정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내 핸드폰을 열어 전화기록을 다시 살폈다. 달리미술관에서 온다던 전화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야? 그 쟝이라는 사람..”

연락도 없이 회사 앞 카페에 앉아있던 더블은 나를 보자 내 앞에 그 카메라 렌즈를 툭 던져 놓았다.

“여기 어쩐 일이야?”

전에 없이 산뜻하게 옷을 갖추어 입은 더블의 낯선 모습에 웃음이 났다.

“웃지 마...”

내 웃음이 민망했던지 더블의 시선이 허둥대더니 괜히 핸드폰을 꺼내 뒤적였다.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린 부드러운 질감의 바이올렛 셔츠가 그의 손놀림에 살짝살짝 흔들거리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손목엔 번쩍거리는 시계까지 매어놓고, 더블의 성정으로 보아 시계는 손목에 메어놓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더블은 손과 팔에 무언가 부착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한 겨울에도 더블은 작업할 때 긴팔 셔츠나 남방을 절대 입지 않았다.

“오늘따라 산뜻하게 차려 입었네? 크롭에 구두까지... 데이트라도 있는 거야?”

밝은 베이지색 크롭 팬츠에 브라운 몽크 스트랩까지 갖춰 신고 폰만 쳐다보고 있던 더블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왔다.

“쟝이라는 사람 조심 하라고...”

웃음기 없이 던진 자신의 말에 내가 답 없이 그저 멀뚱히 보기만 하자 마음에 차지 않는 듯 다시 말했다.

“너는 꼭 물 앞에 내 놓은 어린 애 같아. 똑똑한 줄 알았는데 허당이더라?”

더블은 칼칼하게 줄이 잘 세워진 바지의 무릎을 괜히 손으로 툭툭 쳤다.

“무슨 말인지 알아. 고마워.”

나도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더블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 머리를 살짝 가볍게 건드렸다.

“근데 그 오피스텔 주인은 누구야? 너랑 친한 사람?”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더니 새삼 궁금증이라도 생긴 듯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근데...그 사진 말이야.”

아직도 그 여자의 사진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누군지 누가 그걸 찍었는지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오피스텔 여자 사진?”

“누군 거 같아?”

내 말에 더블은 깜작 놀란 듯 벌떡 일어나 크롭바지를 한 번 치켜 입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얘 봐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아니면 모델이나 배우나 그런 사람이야?”

“너 봤잖아.”

“안 봤어. 그냥 어떤 사진이란 것만 알지...”

“인터넷에 떠도는 그런 사진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뭐 흔하게 찾으려면 찾아지는 그런 사진이라고.”

더블은 괜히 이맛살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그런데 왜 직접 촬영한 것처럼 인화가 돼 있는 거야?”

“그래서 그날 그랬잖아. 뭐 하러 인화를 했냐고. 취향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지.”

“인터넷에 같은 사람의 그런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어서 올려놓을 수 있는 거야?”

박스 안에서 사진이 아래로 쏟아질 때 나는 누군가가 특정한 한 사람을 촬영한 걸로 생각 했었다.

“무슨 상상을 했던 거야? 무슨 상업적인 거라면 몰라도 한 사람을 대상으로 누가 뭐 하러 그렇게 찍겠어? ”

“....”

“모르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촬영한 거라면.... 음... 한 장 쯤은 가지고 싶을지도. 그런데 컴퓨터나 핸드폰도 아니고 인화해서? 그건 정말 아닌 거 같은데?”

“한 번 더, 가볼 용의 있어?”

나는 다시 한 번 거길 가서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다시 갈 용기는 없었다. 무언가 시도하면 한 번에 하나씩 무언가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 그것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이 누군지 대답도 안 해놓고 또 거길 가자고?”

더블은 주인이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 다시 가진 않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지금은 말 할 수 없어. 하지만 나중에 꼭 말해줄 게. 가서 확인할 게 있는데 혼자는 못 가겠어.”

“거기 몰카 몇 개 더 있는 거 아니야?”

농담을 하면서 더블은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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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따라온 건 순전히 머슴 노릇하러 온 거니까 양해하세요.”

더블은 오피스텔을 들어서자마자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마치 어딘가에 또 몰래카메라가 있다는 듯이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며 손까지 살짝 들었다 놓았다.

나는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안팎을 살펴보았다. 그날 더블과 이곳을 나오며 문을 닫고서 손잡이 아래로 조그만 포스트잇 같은 게 문틈에 끼워져 있는 걸 보았었다.
그 포스트잇이 없어진 것 외에 내부는 그날 우리가 해 놓은 그대로였다. 사진 액자 아래도 그날 두고 간 대로 여자의 사진하나가 떨어진 채 그대로였다.

“아니 인터넷에서 구한 사진을 왜 이렇게 고급인화지에 인화 한 거야? 그리고 같은 걸 몇 장씩이나 해놨네. 누군지 멘탈이 궁금하군.”

더블은 사진박스를 가져와 열어놓고는 사진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진은 더블 말대로 직접 촬영한 것처럼 위장 돼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구한 것임이 분명했다. 중복된 같은 사진도 여러 장 들어있는데다 몇몇 사진엔 흐릿한 로고까지 새겨져 있었다.

“이거 색감 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포토프린터랑 같은 거 쓰는 사람 같은데? ”

더블은 사진을 뒤집어놓고 핸드폰 플래시로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인터넷 사진이니까.. 직접 프린터기로 인화한 게 맞겠지...”

“인화지만 좋은 거 쓰면 요즘은 사진 잘 나오니까..... 그런데 이걸 왜 인화를 했냐 이거야. ”

더블은 중얼거리며 다시 하나씩 사진을 박스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결국 그 박스 안의 사진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연출 해 놓은 것이란 말이 되었다. 이걸 보고 황망했던 난 결국 던져 주는 대로 먹잇감을 물었던 셈이었다. 또 다른 몰래카메라가 있었다면 그런 내 모습을 누군가 지켜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블이 가져온 카메라 렌즈를 사진액자 뒷부분 틈에 끼워 넣으려 했지만 제대로 고정이 되지 않아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그걸 왜?”

“원래대로 해 놓고 싶어서...”

더블은 박스를 책장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렌즈를 꺼내 전선을 꽂고 액자 뒤편에 고정시키는 작업을 했다.

“자. 일 잘 봤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더블은 장난스럽게 또 여기저기 벽과 액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더블이 먼저 나가고 잠시 오피스텔 내부를 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 때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던 곳이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이었다.

더블과 함께 오피스텔을 나오는데 다시 가슴에 진동이 느껴졌다.

“오늘은 내가 살게. 특별히.”

“오, 반미주가 오늘 나랑 뭔가 통했네? 좋아. 식당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는 거야.”

더블이 앞장 서 도착한 레스토랑 앞에서 쥬디의 문자를 받았다.

‘1차 미션완료. 조금 전 폰을 가져감.’

레스토랑은 더블이 미리 예약을 한 곳이었다. 안내하는 자리로 걸어가며 더블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미주가 산다니까 내가 이정도 보상은 해야지.”

더블은 크롭팬츠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놓았다.
반지 하나가 들어갈 만한 작은 보석함이었다.

“이게 뭐야....”

“선물....”

내가 더블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더블도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선물은....”

“그래. 하지만 그런 의미 아니야...”

“안 받을래...”

“받아야 해. 내가 너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더블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웃음 속의 눈빛은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미주야.”

“....”

“우리.. 이제 이별하자...”

어느새 더블의 얼굴에서 웃음은 걷히고 애잔한 눈빛만 송곳처럼 내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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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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