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칼럼] '슬로건'만으론 경제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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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참여정부는 집권 초기 동북아 중심경제를 내세우더니 최근에는 또다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달러 달성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경제 '슬로건'은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에게 경제적 희망을 제시하고 현실을 호도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구호다.

박정희 (朴正熙) 정권은 1977년에 경제 15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경제가 90년대 초에 영국 경제를 따라잡는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90년대 초에 나타난 경제 현실은 '슬로건' 경제의 허구성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영국 경제는 60년대 이래 고질적인 '영국병'이 치유돼 정상적인 성장을 지속하는 반면 한국 경제는 그동안 누적된 구조적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 과거관행서 탈피 못한 정책들

그럼에도 김영삼 (金泳三) 정부는 직면하고 있는 한국 경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경제 15년계획을 발표했다.

이때의 '슬로건' 또한 한국 경제가 2010년에 영국 경제를 앞선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영삼 정부는 1인당 GDP 1만달러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타난 경제정책의 결과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으로 알려진 외환위기였다.

외환위기 발생의 주된 요인으로는 GDP 1만달러 목표달성을 위한 정부의 원화 환율에 대한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인접 경쟁국가들인 중국과 일본의 대 달러 환율이 평가절하됐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원화 평가절하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수출의 가격경쟁력은 추락해 96년 국제수지는 2백30억달러 적자였음에도 정부는 환율의 평가절하를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위기를 맞게 됐다. 이러한 경험은 경제 '슬로건'이 국민경제 전반에 주는 피해가 어떠한가를 국민에게 분명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외환위기 이후 크게 달라진 국민 의식과 경제환경 변화에 관계없이 아직도 과거의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달러 표시 1인당 GDP 증가는 성장률이나 설비투자 증가만으로 이뤄지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환율의 변동 추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은 95년 당시 환율 7백75원 대 1달러로 이미 1만달러를 초과달성했다.

그 후 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환율이 급격히 평가절하되자 98년 1인당 GDP는 6천7백달러로 추락했다. 이러한 경험은 달러표시 1인당 GDP의 증가는 단순히 경제 성장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1인당 GDP가 3만달러를 초과하고 있는 것도 지속적인 수출경쟁력 증대를 통한 엔화의 대 달러 환율 평가절상의 결과인 것이다. 한국의 원화 환율과 일본의 엔화 환율의 변동 추이를 비교하면 달러표시 1인당 GDP 증가에 환율이 얼마만큼 기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원화의 대 달러 환율은 64년을 기준으로 할 때 달러당 1백20원대였고, 반면에 일본의 엔화 환율은 3백60엔 대 1달러였다. 그후 4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원화는 1천2백원 대 1달러로 10배 평가절하됐고, 일본의 엔화는 1백20엔 대 1달러로 세 배 평가절상된 것이다.

만약 일본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국제경쟁력 확보를 통한 엔화의 평가절상을 이루지 못했다면 일본의 1인당 GDP도 오늘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 원貨의 평가절상 등 강구하라

따라서 1인당 GDP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이 증대돼 원화의 평가절상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신상품 공급 및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 경제의 기술 수준과 노동시장의 여건은 이와는 크게 괴리돼 있다. 특히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제주체들로부터 신뢰를 크게 상실한 상태이므로, 1인당 GDP 2만달러 달성이라는 경제구호는 새삼 국민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막연한 '슬로건' 제시보다는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 틀을 제시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김종인 前 청와대 경제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