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심심한’ 조선시대 반가 음식, 맛 보려면 두 달 기다려야 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 원 테이블 식당 ‘온지음 식탁’

기사 이미지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가면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 안에 한옥을 품은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사옥이 있다. 이곳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작은 문을 열면 셰프 7명의 손맛과 어우러진 고소한 향기를 만날 수 있다. 10인용 식탁 하나와 커다란 오픈 키친이 전부인 레스토랑 ‘온지음 식탁’의 풍경이다.

‘아는 사람만 알고 온다’는 식당의 품격

겉보기에 화려한 인테리어나 방송에 출연하는 스타 셰프는 없지만 이곳에서 식사를 하려면 두 달 전 예약은 필수다. 식사 때마다 딱 한 팀(최소 6명, 최대 12명)만 받는 원 테이블 식당인 데다 점심·저녁 통틀어 한 달에 15회만 예약을 받기 때문이다. 매달 1일에만 예약을 받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저히 전화 온 순서대로만 예약을 받는 게 철칙이라 심지어 온지음 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조차 원하는 날 예약을 못한 적이 있을 정도다.

까칠한 예약 절차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홍보조차 한 적 없는,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알고 온다’는 이곳만의 특별함은 뭘까. 품격 있는 식사와 공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옛것을 바탕으로 바르고 온전하게 지금을 짓는다’는 뜻을 가진 온지음 전통문화연구소는 한국 전통 의·식·주를 연구한다. 그중 맛 공방은 조선시대 반가(班家) 음식을 중심으로 전통 음식의 맛과 정신을 연구해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되살려낸다. 7명의 셰프는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라 옛 조리서와 반가에 전해져오는 전통 조리법을 연구하는 연구원이자 장인들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반가 음식일까. 신연균 온지음 운영위원장은 “조선시대 궁중 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양반집 음식은 담백한 맛과 맵시, 영양의 균형, 검박하고 절제된 멋을 지녔다”며 “간이 짜거나 맵지 않고 재료 고유의 맛과 향이 살아 있어 현대인에게 올바른 먹거리와 식습관의 본보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호서대학교 정혜경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온지음의 음식을 한 마디로 “자연과 격식을 담은 한식”이라고 표현했다.

이곳의 소박한 인테리어 소품 역시 ‘아는 사람 눈에만 띄는’ 명품들이다. 천장에 무심히 걸려 있는 펜던트 램프는 1920년대 현대 조형예술에 큰 영향을 끼친 바우하우스 시대 작품이고,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벽걸이용 칠판과 그 밑의 장식장은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인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작품이다. 박성배(37) 온지음 선임연구원은 술잔과 물컵 등이 가지런히 전시된 여닫이 장식장을 설명할 때면 “나이가 환갑이 다 되간다(덴마크 디자이너 에릭 코어의 1957년 작)”는 표현을 즐겨 쓴다.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정갈한 메뉴

기사 이미지

온지음 메뉴는 딱 한 가지, 코스 요리로 점심은 1인당 6만6000원, 저녁은 16만원이고 반주를 안하면 11만원이다. 제철 식재료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요리 구성은 계절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요즘같은 초가을에는 밤죽과 능이버섯 두부찜, 안심산적구이, 백화반 등이 메인 요리다. 잘 보관해 두었던 묵은 밤에 햇밤을 섞어 만든 밤죽은 단맛과 고소함이 일품이다. 잘게 썬 능이버섯·닭 안심과 함께 동그랗게 쪄낸 두부찜은 첫 맛은 담백하고 끝 맛은 향기롭다. 특히 삶은 서리태를 곱게 갈아 만든 콩국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숟가락으로 떠낼 만큼 맛있다.

색색의 나물과 고명을 얹는 비빔밥은 오방색이 어우러진 꽃밭 같다 해서 예부터 화반(花飯)이라 불렸다. 온지음에서는 이를 응용해 가을에 맛이 더욱 좋은 흰색 더덕·도라지·무·박·청포묵·밤을 고명으로 쓰는 백화반을 내놓는다. 이때 밥을 비벼 먹는 양념으로는 고추장 대신 간장 양념을 곁들인다. 서울 사대부 종갓집에 내려오는 방법으로 멸치·소고기·양파·파·생강을 넣은 간장을 중탕한 것이다. 각종 나물을 볶을 때 소금·참기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밥과 나물만 비벼도 간이 맞지만 여기에 중탕한 간장 양념을 살짝 떠서 비비면 입안에 깊은 단맛이 퍼진다.

코스 메뉴마다 총 5종류의 전통주가 매칭 되는 것도 온지음 식탁만의 특징이다. 식전주로는 문경산 친환경 오미자에 정통 와인 제조법을 적용해 만든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내놓는다.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궁중 술이자 반가의 약주로 쓰였던 삼해주는 서울시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술이다. 이 외에도 빛깔이 곱고 차게 해서 먹으면 좋은 청감주, 제주의 산물(귤의 품종)로 직접 빚은 산물주를 내놓는다.

여기에 청어알 젓갈, 깻잎 장아찌, 갓김치, 대구알 젓갈 등의 밑반찬이 곁들여진다. 조은희(47) 방장은 “반가의 음식을 하다 보니 고춧가루 들어간 음식이 많지 않아 청어알 젓갈처럼 매콤한 맛을 밑반찬으로 곁들인다”며 “손님들 중에는 메인 요리보다 반찬에 더 감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도 범상치 않다. 한국 전통 식기는 탕반(湯飯) 문화, 즉 국물을 함께 먹는 음식문화에 맞게 오목한 그릇이 많았다. 식생활이 서양화되면서 요즘은 넓은 접시 형태가 두루 쓰이는데 온지음에선 이강효·이봉주 등 신예·중진 작가들과 협력해 멋스러운 옛 그릇들을 현대 감각으로 재현해 쓰고 있다. 1개에 수 십 만원씩 하는 그릇이 대부분이지만 몇 만원대도 꽤 있다.

연구와 식당 운영을 겸하는 셰프들

기사 이미지

온지음 맛공방에서 활동하는 7명의 셰프는 전통의 맛을 연구하는 연구원이자 장인들이다.

온지음 연구원들이 식당 운영을 겸하는 이유는 연구 결과를 실제 손님들에게 선보이고 솔직한 반응과 조언을 듣기 위함이다. 연구원들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식재료와 조리법은 물론 숨은 스토리까지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맛 평가를 경청하는 이유다.

박 선임연구원은 “워낙에 미식가들이 많이 오는 편이라 허투루 들을 게 하나도 없다”며 “어떨 때는 새로운 스승을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 식사를 하러 왔던 손님이 ‘손맛’을 가르쳐준 경우도 있다. 성북동에 사는 70대 노부인이었는데 “정말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다”며 온지음 연구원들을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단다. 이때 노부인이 직접 차려주신 전복죽이 이전에는 못 보던 방식이라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대개 전복죽은 전복을 잘게 썰어 쌀과 함께 볶아 끓이는데, 노부인은 찹쌀을 면포에 싸고 썰지 않은 온전한 전복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끓였다. 그릇에 담아 낼 때도 전복과 국물, 쌀죽을 다른 접시에 담았다. 조 방장은 “노부인의 시댁에 내려오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조리방법·상차림·맛이 색달라서 역시 세상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고수가 많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온지음 연구원들은 ‘어르신들의 손맛’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 공을 들인다. 반가 음식을 기본으로 하되 옛 조리서에서 발견해낸 조리 방법도, 이제는 일상화된 서양식 조리법의 응용도 이들이 주목하는 연구방법이다. 추억이 깃든 향토 음식이나 친숙한 길거리 음식 역시 현대인의 입맛을 연구하는데 필요하다면 반가음식이 지닌 맛과 멋의 체로 걸러내 새롭게 제안한다. 말하자면 재료 고유의 맛과 맵시를 지닌 ‘현대화한 반가 일상식’이 온지음 음식이다. 예를 들어 전통 디저트인 대추고를 만들 때 부드러움을 더하기 위해 현대의 식재료인 생크림과 우유를 섞어 만드는 식이다. 이때 궁중음식 이수자인 조은희 방장과 한식·일식·서양식까지 두루 경험한 박성배 선임연구원의 궁합이 빛을 발한다.

조 방장은 “시간 날 때마다 전국에 맛있다고 소문난 향토음식 전문가들을 찾아 손맛을 배운다”며 “이것이 온지음이 추구하는 방향이고 한식을 차별화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기사 이미지

지난 8월에 펴낸 『온지음이 차리는』은 이렇게 온지음 맛공방 연구원들이 그동안 공부하고 새롭게 정리한 사계절 반가 일상식 100여 개의 레시피를 모은 책이다. 수십 번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고 온지음 식탁 손님들의 의견을 모아 ‘옛 맛을 현대인의 일상식으로 섬세하게 재현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조 방장은 “사라져가고 잊혀가는 음식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