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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짜장면처럼 ‘주문배달’하는 지진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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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은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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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경
내셔널부 기자

울산시 재난관리과 최정식 사무관은 지난 19일 규모 4.5의 여진이 발생했을 때 몹시 답답했다. 울산과 바로 붙어 있는 경북 경주에서 그날 오후 8시33분에 여진이 발생했는데 9분이 지나도록 국민안전처에서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최 사무관이 오후 8시42분에 먼저 수화기를 들고 서둘러 문자를 발송해 달라고 촉구했다. 최 사무관의 요청을 수용했기 때문인지 ‘지진 발생, 안전에 주의’라는 짧은 문자가 지진 발생 15분 만에 울산시민들에게 도착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추가로 센 여진이 발생하지 않자 최 사무관은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시민들에게 일단 귀가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안전처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고 울산시에는 문자를 보낼 권한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최 사무관은 다음 날 0시가 넘자 안전처와 연결된 긴급재난문자방송서비스(CBS) 서버에 ‘일단 귀가해 재난방송을 청취하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 발송을 의뢰했고 0시9분에 ‘울산시 재난안전대책본부’ 명의로 문자가 도착했다.

안전처는 19일 여진의 진앙인 경주에 당일 오후 8시38분과 8시41분에 발송된 문자도 경주시의 요청에 따라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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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5.8의 지진으로 천장이 무너져 폐쇄된 울산 울주군 두서면의 노인요양시설. [사진 최은경 기자]

재난 상황을 가장 신속하게 국민에게 알려야 할 안전처가 주문해야 배달하는 짜장면 가게처럼 일을 처리했다는 얘기다.

국민의 눈으로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행정이 버젓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행법에 따르면 문자 발송 권한은 안전처만 갖고 있고 지자체를 비롯해 380여 개 기관은 안전처에 문자 발송을 요청만 할 수 있다. 지난 20일 기자가 만난 김기현 울산시장은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지자체에 문자 발송 권한을 달라고 했지만 안전처가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말했다.

안전처의 설명대로라면 선출직 단체장들이 혹시라도 주민들의 전화번호를 선거에 악용할 경우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하지만 긴급재난문자는 일반 문자메시지와 달리 안전처가 지정한 통신사 기지국 주변 휴대전화 사용자들에게 자동으로 발송되기 때문에 지자체가 전화번호를 직접 관리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김 시장은 “사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전처는 여기저기서 문자를 보내면 오히려 혼선을 빚는다며 기존 방식을 고수한다. 하지만 일선 현장을 잘 모르는 안전처 공무원들이 지금처럼 상황 파악하느라 꾸물거리면 애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가 생긴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재난문자 발송 권한의 과감한 이양이 필요하다.

최 은 경
내셔널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