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역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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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50년대를 풍미한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은 아직도 일본의 국민영웅이다. 올해는 그의 사망 40주년이 된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23년 함경남도에서 출생해 처음엔 씨름을 했다. 일본인에게 스카우트돼 46년 일본 스모계에 데뷔한다. 당시 '조선인'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폐디스토마에 걸려 3년 만에 은퇴하고 만다. 이것이 인생의 전기가 된다. 건설회사 샐러리맨으로 일하던 역도산은 주일미군 위문차 방일한 미국 프로레슬러의 눈에 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프로레슬러로서 혹독한 수련을 받고 2백여회나 시합을 벌인다.

그에겐 남다른 국제감각이 있었다. 프로레슬링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보고 전미레슬링협회(NWA) 프로모터 자격을 따낸다. NWA 소속 레슬러의 일본 흥행권을 손에 넣은 것이다. 또 그는 세계를 누비며 장사가 될 만한 레슬러들을 일본으로 불러 다섯차례의 월드리그를 벌였다.

시대를 읽는 안목도 남달랐다. 일찌감치 TV의 잠재력에 눈을 뜨고 프로레슬링을 생중계했다. 주변에선 왜 공짜로 보여주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TV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서비스 정신도 투철했다. 그는 늘 경기 초반엔 상대의 반칙에 당하기만 했다. 관중들의 흥분이 비등점에 도달하는 순간 특기인 가라테(唐手) 촙으로 상대를 누이곤 했다. 권선징악의 시나리오를 담아낸 것이다. 일본의 국민가수이자 그의 열성팬이던 미소라 히바리가 "왜 처음부터 가라테 촙을 쓰지 않느냐"고 묻자 당황해 했다고도 한다.

역도산은 전설적인 세계챔피언 루 테즈를 쓰러뜨리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일본 언론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영웅시했다. 패전 후의 미국 콤플렉스를 역도산이 후련하게 씻어줬기 때문이다. 반미감정의 카타르시스였던 셈이다.

역도산은 63년 야쿠자의 칼에 찔려 몇차례 수술을 받는 도중 마취 미스로 사망한다.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가 뒤를 이었지만 역도산의 카리스마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지난주 도쿄(東京)에선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62)가 역도산의 삶을 회고한 책을 펴냈다. 또 기자회견을 열고 "38도선에 남편의 동상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지금도 역도산의 전설이 계속되고 있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