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안의에 연암사적비|5년동안 현감지낸 곳에 학자·주민들 뜻모아 건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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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길이 역사적 기념물이 될 연암 박지원의 사적비가 세워졌다. l7일 하오 경남함양군안의안의 국민학교 교정에선 서울의 학자와 이 지역 유지 및 주민 7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연암 사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서울에선 이우성(성균관대) 송재소(성균관대) 임형택(성균관대) 김시업(성균관대) 교수등이, 이 지방에선 하충현 연암 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73·안의고이사장) 김태순부위원장(경남교육위원)등 다수의 교육자·학자들이 참석했다.
하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사적비가 안의에 서도록 도와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이 사적비에 우리 고장 주민들의 마음을 새겼다』 고 덧붙였다. 그는 『연암사상은 우리 민족사를 정립시키는데 중요 자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암 박지원(1737∼1805) 은 우리나라 최대 실학자의 한사람이며 탁월한 문학자·사상가였으나 그의 업적을 기릴 만한 기념물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연고지인 안의는 물론 그의 생장지인 서울 등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으며 장단에 있는 그의 묘소는 휴전선·이북에 있다. 결국 이번 사적비가 그의 최초이자 유일한 기념물이 됐다.
안의는 이곳을 떼어놓고는 연암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연암에겐 깊은 인연이 있는 땅이다. 그의 길지 않은 관직생활중 5년간 현감으로 있던 곳이 바로 안의다.
그는 당시 행정가로서의 업적도 훌륭했지만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이 고을에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작품활동 또한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서 대표적인 저작이 대부분 여기서 이뤄졌다. 즉 안의는 그의 사상과 포부를 실천하고자 온 정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연암이 안의에 있는 동안 이곳은 당시 서울의 일류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 전국 문인들의 집결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정조는 일에 바빠 가보고 싶어도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박제가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안의에 다녀오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됐을 때 안의 사람들은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 선정비를 세우고자 했으나 연암은 이를 극력 말리고, 만약 세운다면 사람을 보내 깨버리겠다고 까지해 결국 그 흔한 선정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번 사적비는 그의 거처였던 옛안의현 동헌터인 안의국교 교정에 세워진 것이다.
이 사적비가 세워지기 까지는 연암을 연구하며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과 이 지방 유지들의 노력이 컸다.
지난 84년7월 방학을 틈타 연암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안의를 찾아갔다. 이우성·강만길 (고려대)·안병직(서울대)·송재소교수등 l6명. 이들은 이곳에서 연암이 남긴 어떤 자취도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하씨등 이 지역 유지들과 만나 우선 연암 사적비 건립운동을 펴기로 했다. 학자들은 즉석에서 30여만원의 기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하씨는 바로 안의를 비롯, 함양·거창의 교육계·관계·종교계· 실업계 유지 1백여명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서울의 학자들도 산단학회·국어국문학회·한국사연구회·한국고전문학연구회·한국한문학연구회·다산연구회등 6개학회로 후원회를 결성, 이 사업을 지원했다. 사적비의 비문은 이우성교수가 직접 지었다.
안의사람들과 학자들은 연암기념사업이 사적비 건립에 그치지 말고 연암 기념관건립이나 현장 복원사업까지 나아가 연암의 얼이 계승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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