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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카톡 500건”…관태기 빠진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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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해까지 대기업 홍보 부서에 근무했던 김서희(여)씨는 마당발로 통했다. ‘사람이 재산’이란 생각에 와인 모임을 조직하고 애견 관련 사이트도 개설해 활동하며 500여 명의 인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남자와 결혼하면서 회사도 관뒀다. 김씨는 “하루에 많게는 네 번씩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들어왔다가도 상사가 부르면 화장 고치고 뛰어나가던 삶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피곤한 인맥사회
평균 194명 저장, 대화는 24명
“인맥관리 중요” 90%지만
“인맥 때문에 피곤하다” 70%
지인 많아도 친한 친구 없어
혼밥·혼술 문화 점점 늘어나

중견 출판기업 영업직으로 일하는 김모(35)씨의 카카오톡 친구는 955명이다. 하루 500건 안팎의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점심 식사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밥 등으로 혼자 때운다. 김씨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점심시간만이라도 이를 피하고 싶다. 관계 맺는 게 너무 피곤해 결혼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관계 맺음에서 비롯된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특히 2010년을 전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급속한 확장으로 사적인 관계 맺기에 가속도가 붙고 광대화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오프라인 구분 없이 폭이 넓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관계의 깊이는 얕아지는 ‘관계 확장의 역설(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던바의 법칙)’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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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5월 25~26일) 결과, 전체 응답자 중 89.8%가 “인맥 관리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70.3%는 “인맥 관리가 피곤하다”고 말했다. 학력이 높고(대재 이상 74.3%) 자영업자(78.8%)나 사무직(75.3%)일수록 “피곤하다”는 답변이 많았다. 또 조사 대상자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평균 221.6개였으나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15.5%(34.5명)에 불과했다.

관계 확장의 역설…“점심이라도 혼자 먹고 싶다”

카카오톡 등 메신저에 저장된 평균 194.3명 중 정작 대화는 23.6명과만 나눴다.

이처럼 구성원의 피로감이 크다는 건 8·15 해방 이후 격변기와 현대화 시기를 거치며 공·사 양쪽 영역에서 인맥이 ‘출세의 척도이자 생활의 중심’을 차지했던 사회 패러다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경고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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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한신대 철학 교수는 “그동안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선 학연(學緣)·지연(地緣)·업연(業緣)으로 얽힌 사적 관계가 공적 영역을 점유해 온 게 사실”이라며 “그러다 보니 목적 달성 수단으로서의 관계 맺기가 만연하면서 ‘아는 사람’은 많아도 ‘진짜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순수한 ‘인정’ 대신 목적이 먼저인 ‘인맥’ 사회”라며 “여기에 부정적이거나 상처 받은 사람들이 관계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관태기(관계+권태기)’를 겪고 있는 셈”이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염증은 관계 줄이기나 관계 끊기로 이어져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문화가 퍼지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여가 활동을 혼자 하는 사람은 2007년 44.1%에서 2014년 56.8%로 12.7%포인트 늘었다. 배영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다음달 28일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한국이 ‘관계 프리(free)’ 사회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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