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학자이자 대시인" 송재소(성균관대 교수「정약용 재조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선조의 사상가 다산 정약용은 위대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시인이었다. 투철한 시대정신의 구현자로서, 인간미 넘치는 한 자연인으로서 2천5백 여수의 시를 남긴 그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는 가려진바 없지 않다. 「다산문학연구」로 박사학위 (서울대)를 받은바 있는 송재소 교수(성균관대·한국한문학)로부터 다산의 시 세계를 들어본다.
다산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가운데 2천5백 여수의 한시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으로서의 다산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소홀했다. 그 이유는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산문의 비중에 눌려 그의 시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다산은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이 그렇듯이 다산의 시는 그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산사상의 본질은 개혁사상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의 사회를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사회로 진단했다. 그는 예리한 의사의 자세로 이 중환에 걸린 사회의 병인을 진단했으며 그 치료 책을 제시했다. 『목민심서』 등의 산문이 다산의 처방전이라면 환자에 대한 임상보고서가 그의 시인 셈이다.
×××
시냇가 헌집 한 채 뚝배기 같아/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안에 있는 물건 초라하기 짝이 없어/모조리 팔아도 칠, 팔푼이 안되겠네/ 개꼬리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무너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
병든 당시 사회의 증세를 극명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와 같이 다산은 농민들의 굶주림을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생산자인 농민을 생산물로부터 소외시키게 한 사회적 모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이를 시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농민들의 편에 있었다. 이것은 『항상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가슴 아파하며 차마 버리지 않을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시라고 할 수 있다 든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한 그의 이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정신 때문에 그는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배지 강진 땅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에도 그의 비판의식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수많은 걸작 시들이 이 시기에 쓰여졌다.
×××
호랑이가 어린양을 잡아먹고는/입술에 붉은 피 낭자하건만/호랑이 위세가 이미 세워졌는지라/여우·토끼, 호랑이를 어질다 찬양하네.
×××
이런 시편들에서 우리는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한 그의 증오가 유배 전보다 더욱 강렬함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농민과 어민들의 애환을 담은 민요조의 시들을 써서 농어민에 대한 그의 따뜻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이렇듯 근엄한 학문적 자세와 강렬한 사회의식을 지닌 다산에게도 남달리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다.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노라면 근엄한 경세가가 아닌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다산을 만나게 된다.
또한 부인을 그리는 애틋한 정이 담겨 있는 시들을 읽을 때는 일세를 풍미한 개혁가가 아닌 다정스런 남편으로서의 다산을 접하게된다.
×××
비단같은 은하수 빗긴 저녁에/총총한 별들은 반짝반짝 빛나고/풀벌레 울어울어 서로 화답하는 때에/대숲에 이슬방울 하얗게 맺혀 있네/옷깃을 부여잡고 잠 못 이루며/이리저리 서성이다 어느덧 새벽인데/흐르는 세월이 이 마음 흔들어/떨어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부인에게 바친 시다. 다산은 결코 기교에 능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서정시는 꾸밈없는 진실성 때문에 독자를 감동시킨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