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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설치, 더 이상 미룰 일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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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를 위한 10번째 입법 도전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고위 공직자의 범죄 행위에 대해 인지나 고소·고발이 없어도 국회 교섭단체가 요구하면 공수처가 수사하도록 하는 공수처 신설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고위 공직자와 가족(배우자, 직계존비속, 형제자매)을 수사 대상으로 하되 전직 대통령은 배우자와 4촌까지 수사할 수 있다.

공수처 입법 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검찰 개혁의 일환으로 20년 전인 1996년 도입 필요성이 제기된 뒤 노무현 정부 때 신설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이후 ‘벤츠 여검사’ 등 검찰 내부 비리가 터지거나 수사가 미진할 때마다 공수처 입법안이 발의됐지만 검찰과 다수당인 새누리당의 끈질긴 반대로 9번 연속 폐기됐다. 이번에도 여권에선 상설특감, 특별검찰관 제도의 옥상옥이고 정쟁 수단으로 변질 될 뿐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기존 수사체계를 허무는 초헌법적 발상이란 것이다.

그런 우려에 일리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야권 법안을 보면 국회의원, 판·검사를 포함한 사법·행정부의 3급 이상 모든 공무원과 가족은 물론 군 검찰만 할 수 있었던 군 장성도 독자적인 수사권, 기소권, 공소 유지권을 갖는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다. 공수처는 김영란법 위반 혐의도 수사할 수 있다. 게다가 국회 재적의원 10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범죄 단서 유무와 상관없이 수사에 착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려운 건 공수처가 형식상 독립기구지만 실제론 이런 무소불위 권력이 특정 정파의 이해에 따라 춤출 소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교섭단체 요구만으로 전직 대통령을 수사할 수 있다면 정권 교체 때마다 정쟁성 수사가 벌어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공수처가 삼권분립 원칙을 넘어 정파적 시각에 따라 권한을 남용할 수 있다는 우려다. 진영 논리에 따른 정쟁을 일삼다가 의원들 자신들의 이익엔 한통속으로 뭉쳤던 우리 정치권의 그동안 행태를 보면 기우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과거 정치권은 법안추진 과정에서 공수처 수사 대상에서 국회의원을 제외하고 판사와 검사 등 고위 공직자만으로 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민 10명 중 7명이 공수처 신설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검찰을 둘러싼 부정부패의 뿌리가 너무 깊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또 검사들의 비리와 일탈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은 검찰이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란 점이 출발선이다. 우리 검찰은 수사권과 수사지휘권, 기소권, 공소유지권을 독점한다. 세계 어느 검찰보다 막강한 힘을 가졌고 그 오·남용을 감시·견제할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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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과거 ‘스폰서 검사’ ‘뇌물 검사’ 등 비리가 꼬리를 물때마다 개혁을 다짐했지만 매번 공염불에 그쳤다. 진경준 검사장의 뇌물 사건 역시 검찰이 여론에 떠밀려 특임검사를 임명하고 나서야 본궤도에 올랐다. 특임검사는 23일 만에 진경준을 구속 기소했다. 3개월이 넘도록 개인 간 거래일 뿐이라며 수사에 소극적이던 검찰로선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대검의 대대적 검찰개혁 약속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며 검찰의 자정기능은 죽은 것 아니냐는 여론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찰의 기소 독점권을 깨뜨리는 공수처 설치가 검찰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의 구조적 비리를 근절하기 위한 해법이 될 수 있다. 검찰 개혁은 특정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다만 공수처를 도입하면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대신 사정기능 중복으로 인한 비효율, 사정기관인 공수처의 수사권 오·남용 등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선진국에서 부패 범죄를 전담하는 별도 수사기구를 설치한 사례를 거의 찾을 수 없는 건 이런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 현실에서 정치 보복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그런 만큼 여야는 공수처 설치 자체가 새로운 정쟁거리가 안 되도록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잘 다듬어 박수 받을 합의를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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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 정국과 여당 분열로 입법화 조건은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다. 하지만 최대 난관은 국회선진화법이다. 선진화법에 따라 본회의에 법안이 상정되려면 ▶소관 상임위 의결 ▶신속처리대상 안건 지정 ▶국회의장 직권 상정의 3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법사위원장이 공수처 신설에 반대하는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고 새누리당은 반대 당론이어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정세균 의장이 취임 초반부터 직권 상정 카드를 쓸 확률도 높지 않다. 신속처리 대상 안건이 되려면 재적 의원 5분의 3 또는 소관 상임위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의원 180명이 찬성하거나 법사위원 17명(여당 7명) 중 11명이 동의해야 한다. 전체 의원 기준으론 새누리당 의원 15명, 법사위에선 1명을 정치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최근 새누리당에선 비박계에서 공수처 찬성 의견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검찰 스스로 개혁이 지지부진할 경우 공수처 신설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할 수밖에 없다”는 발언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