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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음성 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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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기 1231년, 고려 고종임금18년.
동북아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 세계를 향해 진군하던 몽고가 고려에도 침략의 말발굽을 돌린다.「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아들 「오고타이」(태종) 가 만주 여진의 금나라를 치기 위해 몸소 군사를 일으켜 나서면서 부하장수 「살리타이」에게 별군을 주어 고려를 장악하도록 명령했다.
고려는 그때 정중부의 쿠데타(1170년) 로 시작된 군인집권시대가 최충헌의 집권(1196년)후 최씨 정권으로 넘어간뒤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2대째 나라를 독재하고 있었다.
「천하무적」 몽고기병의 기습에 최우는 농민군을 포함한 방위군을 편성, 대항해 나섰으나 역부족.
몽고군은 물밀듯이 밀고내려와 개경을 포위했고 멀리 충주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최우는 하는수 없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의를 맺고 몽고군은 이듬해 철수한다. 이른바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근 1세기 피나는 항쟁의 시발이 되는 몽고와의 첫 대결에서 고려는 전쟁에 졌으나 「천하무적」 몽고기병의 명예를 여지없이 깨뜨린 기적같은 「전투승리」의 한막 기록을 역사에 남긴다.

<왕이 항복을 권유>
서북면 범마사 박서가 바로 그 기적의 지휘관.
박서는 평북 귀주성에 진을 치고 김중온·김경손등 장수, 인근고을의 백성들과 힘을 합해 쳐들어오는 몽고군을 막아냈다.
포를 쏘고 땅을 뚫고 사다리를 걸고 온갗 공성무기를 동원한 몽고군의 공격은 번번이 참패로 돌아가고 작은 성 하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살리타이」 는 작전을 바꿔 귀주성을 버려두고 개성을 바로 공격, 항복을 받았다. 다시 군사를 돌이켜 귀주성을 치기 여러날, 쌓이는건 몽고군의 시체뿐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모욕감과 분노가 경탄과 존경으로 바뀐 「살리타이」는 고종 임금에게 성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명령하도록 요구했다. 지범마사 최림준와 감찰어사 민의가 사절로 가 박서에게 항복을 타일렀다. 박서는 들은체도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된 민의가 『임금의 명령을 거스를 셈이냐. 차라리 내가 죽겠다』 고 칼을 빼들자 박서는 왕명을 어길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지켜 고집을 꺾었다. 성을 열어 항복하곤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가버렸다.
마침내 문이 열린 성안팎을 둘러본 나이 70의 몽고군 장수는 『내평생 천하에 전쟁을 다녔어도 이런 공격을 받고 항복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 이라고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고려사』)
음성 박씨는 바로 이 철혈남아 박서의 후예다.
뒷날 박서가 문하시중에 으르고 음성백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원래 본관이던 「죽성」에서 분가, 따로 본관을 쓰게된 것이다.
서의 아들 재는 공부상서에 올랐다.
재의 아들 현계는 충숙왕때 조돈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됬고 현계의 두아들 중 문단은 강화부사, 문길은 하시랑에까지 올랐다.
문단의 아들 제는 학문으로 명망이 높아 길재·정몽주등과 함게 사귀었다.
문길의 장남 정이 이른바 「함흥차사」 비화의 주인공.
박정은 일찌기 이성계와 인연을 맺어 위화도회군에 동참했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상강군에 올랐다.
그러나 이어 터진 골육상쟁의 왕자란 임금자리를 놓고 피를 나눈 자식형제들이 서로 칼을 부닥치는 패륜에 극도로 상심한 이성계는 고향 함흥으로 내려가 버렸다. 새로 임금이 된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환궁사자를 보냈다. 이성계는 사자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원수처럼 멀어진 부자사이를 누가 다시 이을 수 있을까.
이성계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박순은 사자가 되기를 자경했다. 함흥에 가 이성계를 만난 박순은 돌아가겠다는 확약을 받고 귀로에 올랐다 .이성계를 함흥서 따르고 있던 측근들은 이번 사자도 죽이자고 주장했다. 차마 옛친구를 죽일 수 없어 이성계는 시간을 끌다가 박정이 용흥강을 건너가 추격이 어려울 시간쯤에야 이를 허락했다.

<부인 임씨도 자결>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인가. 박순은 도중에 급병이 나 시간을 지체하다 나루터에서 추격자에 붙들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부음을 듣고 부인 장흥임씨도 따라 자결했다.
태종은 그에게 판중추 부사의 벼슬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부인 임씨에게도 정문을 내렸다.
박소 (좌슴지) 는 단종의 폐위에 복위를 꾀하다 형을 받은 31인 중 한사람.
박순의 손자인 박숙주 (대사헌)·박숙무 (목사)·박숙달 (집의)·박숙창 (범마평사)·박숙번 (참의) 등이 모두 현달, 당시 세상에선「오옥」 이라고 했다.

<군수 조달에 큰 공>
박정 (좌찬성)·박소 (현감)·박흔 (참판)·박문형 (좌찬성)·박조(내자시정)·박윤진 (성균제주)·박붕 (판관)·박하 (사예)·박유경(참의)·박인원 (부사) 등이 조선조 초·중기 음성 박씨를 빛낸 이들.
임진왜란이 나자 박광옥은 고향에서 고경명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막았고 나주 목사로 임명돼 곡창 호남의 군량미를 권율원수 부대에 보내는 등 군수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박응량 (홍문관 부제학) ·박응항 (범조참의) · 박지성 (좌승지)·박상빈 (참의)·박언 (한성좌윤)·박종훌 (장령) 등이 조선후기 음성 박씨 인물.
호조참판을 지낸 박호원은 명필로 이름을 떨쳐 영조임금으로부터 두번이나 말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
현재 충청일보 사장 박상진씨, 천보흥업회장 박제만, 선경그룹이사 박도근씨 등이 각계서 활약한다.

<지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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