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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고령에 2번 수술, 국가 상징 책무 수행 어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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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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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생전 퇴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 이 영상은 전날 일왕의 거처인 도쿄 황거(皇居)에서 궁내청 전속 카메라맨이 촬영했다. [로이터=뉴스1]

“이미 80세를 넘어 점차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을 다해 (국가)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건강할 때 물려주고 싶다 피력
200년 만에 생전 양위 이뤄질 듯
퇴위 뒤 호칭 등 특별법 논의 과제
일각선 새 일왕 즉위식 일정 거론
도쿄올림픽 열리는 2020년 제시

8일 오후 3시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생전에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공개했다. 약 10분간 TV로 중계된 영상 메시지에서 일왕은 ‘생전 퇴위’라는 표현 없이 퇴위 의향을 밝혔다. 시종 담담한 어조로 준비한 원고를 읽어내려 갔다. 영상 메시지는 하루 전인 7일 오후 수록됐다고 한다.

그는 “두 번의 외과 수술을 받고 여기에 더해 고령에 의한 체력의 저하를 느끼게 됐을 무렵부터 과거처럼 무거운 책무 수행이 곤란할 경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 황족에게 좋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천황이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을 경우 지금까지 보여진 것처럼 사회가 정체하고 국민의 생활에도 여러 영향이 미칠 것이 걱정된다”고 강조했다.

일왕이 중병 등으로 책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섭정(攝政)을 두는 것에 대해선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채 생애의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 천황이라는 데는 변화가 없다”며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일왕 사후 ‘모가리’(殯,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관에 넣어서 빈소 등에 안치해 두는 일)가 약 2개월, 이후 장례 절차가 1년간 이어지는 등의 왕실 관례를 거론하며 “행사에 관여하는 사람들, 특히 남겨진 가족은 매우 엄혹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3년에 전립선암 수술을, 2012년에는 심장바이패스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이날 메시지는 건강할 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령화’ ‘고령’이라는 단어를 각각 두 차례 써가며 생전 퇴위 의향을 드러냈다. 일왕은 일본 헌법상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고 있지 않는다고 규정된 만큼 생전 퇴위 등의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일왕이 물러나면 왕위는 나루히토(德仁·56) 왕세자가 승계하게 된다. 일왕의 생전 퇴위가 실현될 경우 에도(江戶)시대 말기인 1817년 고가쿠(光格) 일왕(1780∼1817년 재위)이래 약 200년 만이다.

왕실을 관장하는 가자오카 노리유키(風岡典之) 궁내청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아키히토 일왕은 5~6년 전부터 나이의 영향으로 충분히 활동을 다할 수 없다는 점을 걱정했다고 한다. 궁내청은 생전 퇴위를 둘러싼 일왕의 마음의 표명이 지난해부터 강해지면서 공표 시기를 검토해왔다고 그는 소개했다. 가자오카 장관은 향후 대응에 대해 “공무 축소를 곧바로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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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아키히토 일왕의 메시지에 따라 생전 퇴위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로선 국민의 70% 이상이 생전 퇴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기 어렵다. 니혼게이자이 신문 여론조사에서 일본인 77%가 일왕의 생전 퇴위를 인정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문제는 왕실 제도의 기본법인 왕실전범(典範)에 생전 퇴위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일왕의 생전 퇴위가 이뤄지려면 국민적 논의를 거쳐 왕실전범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는 현재 내각에 설치돼 있는 왕실전범개정 준비실을 중심으로 검토될 전망이다. 다만, 왕실전범을 개정할 경우 여성 일왕 인정 문제 등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한 만큼 아키히토 일왕에 한해 생전 퇴위를 인정하는 특별법을 만드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특별법 제정으로 간다 해도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왕이 물러나면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다. 현재의 왕실전범에 이에 대한 규정이 없는 만큼 새로 정해야 한다. 과거에는 ‘상황 ’이나 불교에 귀의한 상황은 ‘법황 ’으로 불렀지만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왕세자 업무를 누가 할 것인지도 과제다.

여기에 왕실 예산을 정한 왕실경제법 등의 개정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나 같이 왕실제도의 근간과 맞물린 사안인 만큼 특별법 제정에도 수년은 걸릴 전망이다. 전문가 일각에선 2018년 특별법 제정,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 새 일왕 즉위의 스케줄을 제시하기도 한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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