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의 신비를 벗긴다|전북익산 미륵사지·입점리고분 발굴 한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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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백제 도읍설이 있는 전북익산지역의 백제문화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l천4백여년전 이 지역 백제 문화권의 신비를 새삼 밝혀주고 있는 고고학적 「조명등」은 최근 한 고교생에 의해 발견된 입점리 백제고분과 익산미륵사지.
이들 두 유적은 백제문화가 고대 일본 문화의 원류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당시 한반도 삼국중 선진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주었다.
문공부가 공식 발굴(2월27일∼4월30일)중인 입점리고분은 공주 무령왕능에 이은 제2의 백제 처녀분으로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다.
발견 당시 출토된 이 고분의 금동관과 금동관모및 공식발굴에서 수습된 관모 후면장식은 한국 고고학계에 몇가지 신기원을 기록하면서 일본북구주 후나야마 (선산) 고분문화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첫째의 신기원은 금동관의 제작기법이 관대와 입절을 잇는데 전혀 못을 쓴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얇은 금동판관대에 산모양의 보주형 입식3개를 붙여 만든 입점리 백제 고분의 금동관은 그 형식이 아주 단조로운 고식이며 영낙을 조화로이 붙여 화려한 장식을 갖추기도 했다.
고대 금동관에서 이같은 제작상의 특성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하나의 신기원은 관모 후면 장식의 출토다. 장엄한 의표를 나타낸 고대 장식중 가장 으뜸인 것으로 평가된 이관모 후면 장식은 한국 고분에서 아직까지 출토된 예가 없다.
이같은 장식으로는 후나야마 고분 출토품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6세기초 만들어진 후나야마 고분의 관모 후면 장식은 5세기말 입점리 백제고분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김기웅씨 (문화재전문위원)는 『당시 일본은 금이나 동을 다룰 기술이 없었던 만큼 후나야마 고분의 장식은 백제에서 완전한 제작품을 수입했거나 백제 기술자가 건너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백제는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초토화된 역사로 끝났기 때문에 가시유적이 신라만큼 풍부하지 못하고 고분도 거의가 도굴되거나 지표에 묻혀버려 발굴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이번 익산 입점리 백제고분은 발견 당시의 유물 수습이 비전문적인 학생과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전혀 도굴 흔적이 없는 「처녀분」이란 점에서 백제 문화 규명의 귀중한 보고인 것이다.
지난 74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동탑지 발굴을 시작한 이래 문공부의 제1차 5개년 (80∼84년), 제2차 5개년 발굴(85∼89년)이 계속중인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문화의 웅장함과 특성을 잘 밝혀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는 목탑으로 추정돼온 동탑지가 현존 서탑과 똑같은 표고·규모의우탑이 섰던 자리고 경내 규모가 경주 황룡사 (2만4천8백30평)와 같은 크기(2만3천평)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사지 주변부를 발굴중인 미륵사지는 완전한 발굴을 끝내면 황룡사지보다 더 큰규모일 가능성이 있다.
황룡사와 미륵사는 다같이 7세기 전반에 건립된 신라·백제의 대표적 국찰.
미륵사지의 규모가 밝혀짐으로써 그같은 대규모 국찰은 수도에다 세우는게 관례였음을 감안, 익산이 사비성(부여) 백제시대의 일시 도읍지였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원래 익산의 백제 도읍설은 중국 육조시대 문헌인 육과찬 『관세음응험기』의『백제무광왕 (무왕) 이 정관17년 도읍을 지모밀지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연유됐다.
이 기록은 근래 한 일본학자의 연구로 새삼 부상했고 국내 국어학자들로부터는『현재(괴산 왕궁리 「모질매」라는 마을이 곧 지모밀지』라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이제 익산 미륵사지와 백제 고분은 사학·고고학계의 백제문화 연구 및 백제의 익산 도읍설, 호남공략의 전략요충 별도설등의 규명에 더욱 많은 자료들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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