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정담] “휴대폰 꺼내 놓으세요” 의원들 녹취 노이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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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회가 ‘녹음(錄音)포비아(phobia·공포증)’에 빠져 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뒤 잇따라 ‘녹취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녹음 스캔들 잇따르는 여의도
만일 대비해 셀프녹음 의원 늘고
우상호 “노트북 안 치우면 말 안 해”
대부분은 평소 말 조심하는 체념형
“방법이 나쁘면 결과도 인정 안 돼”
지상욱 등 독수독과 원칙 주장도

실제로 올해에만 여러 건의 녹취 스캔들이 터졌다.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김무성 전 대표에게 욕설을 날린 전화 막말이 녹취돼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고, 지난달엔 윤 의원과 최경환 의원,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성회 전 의원에게 총선 지역구 변경을 요구한 전화 녹취록이 또다시 공개됐다. 이정현 의원과 KBS보도국장 간의 세월호 보도 관련 대화록도 세상에 노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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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방어용 셀프녹음=새누리당 8·9 전당대회 최고위원에 출마한 비박계 이은재 의원은 “윤상현 의원 녹취록 파문 직후에 친박계 의원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더니 ‘이거 다 녹음할 겁니다’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반 농담이었지만 녹취록 사건이 미친 파장은 그만큼 컸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익명을 요청한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요즘 ‘셀프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말이 녹취된 후 앞뒤 맥락이 잘려 공개되는 일을 막으려면 나도 녹취해 텍스트를 확보해 놔야 한다”고 말했다. 지자체장 출신의 한 새누리당 의원도 “지자체장 시절 민원·청탁 등 ‘위험한’ 전화가 많아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② 원천봉쇄형=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원천봉쇄’형이다. 그는 현안에 대한 배경설명을 위해 오찬 기자간담회를 할 때는 “노트북 집어넣으세요~. 다 치울 때까지 말 안 할 겁니다”고 요구한다. 스마트폰 녹음도 물론 허용하지 않는다. “녹음은 소통을 차단시킨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런 우 원내대표지만 무심코 뱉은 말이 녹음돼 곤욕을 치렀다.

지난달 20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새누리당 비박계 김성태 의원과 마주치자 “이번에 당 대표에 안 나가시느냐. 개나 소나 다 나가던데”라고 농담을 건넸다. 김 의원은 웃으며 “개나 소가 안 되려고 안 나간다”고 답했다. 이 대화가 퍼지면서 새누리당이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비판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 원내대표는 “서로 농담한 것이었다. 덕담 차원”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우 원내대표의 측근은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아무도 적지 않았는데, 대화내용이 토씨 하나 안 틀린 걸 보면 누군가 녹음한 것”이라고 말했다.

③ 다수는 체념형=새누리당 비박계 중진의원은 친박계쪽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대화 도중 “지금 녹음하는 거 아니냐”며 수시로 상대방의 휴대전화를 확인한다고 한다. 일종의 ‘예방형’이다. 자신의 말이 친박계에 의해 불리하게 이용될까 염려해서다.

하지만 대다수는 “녹음하려면 하라”는 체념형이다. 대신 자신의 말이 다 녹음되는 것으로 여기고 평소에 말을 주의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신경민 더민주 의원은 “민원인들, 특히 시비 거는 투로 나오는 이들은 100% 녹음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전화하거나 대화할 때 ‘내가 지금 스피커에 대고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석준 새누리당 의원도 “전화 통화는 항상 녹음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말을 조심한다”며 “중요하고 민감한 얘기는 가급적 직접 만나서 하게 된다”고 했다.

의원 대부분은 이런 세태가 유감스럽다고 말한다. 김명연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녹취가 일상화돼 신경이 쓰여서 사람 만나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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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비밀보호법상 당사자 간엔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불문하고 녹취·녹음이 허용된다. 제3자가 녹음할 경우에 불법이다.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은 “현행법 때문에 인간적 신뢰 관계가 깨지는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상욱 새누리당 의원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취득된 모든 결과물은 가치로 인정받지 않도록 하는 독수독과(毒樹毒果·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도 독이 있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충형·이지상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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