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치넘치고 세태 날카롭게 풍자|대학가 속어 3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학가에서 유행하고 있는 속어는 대학생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편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담고있다. 번득이는 재치와 신선함이 생명인 이들 속어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우리나라 대학문화 30년의 한 단면인 이들 속어는 어떤 모습일까. 84년부터 두차례에 걸쳐 대학가의 속어를 수집. 정리했던 서정범교수(경희대·국어학)가 최근 54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학가에 번진 속어의 전형을 정리했다.

<50년대>
6·25이후 군에 입대하기를 꺼려하던 당시의 사회풍조와 차차 번지기 시작한 자유연애를 풍자한 것들이 많다.
54년에 학생들은 징집영장을「청춘차압장」이라고 불렀다. 일부 특수층의 자제들은 군입대를 기피, 해외에 유학을 떠나는 마당에 군에 간다는 것은 청춘을 차압당한다고 생각했던것.
대학가에 휴강이 잦았던 55년에는「흐르지 않는 강」이란 말이 유행했다. 「휴강」의 「강」을「강」으로 풀이한 것. 이 시절 유명교수는 보따리장사처럼 이 대학 저대학을 오가며 강의를 맡아 휴강이 잦았다.
비슷한 이유로 56년에는「알간디교수」가 유행했는데 이는 실력이 없는 교수를 가리키는 말.
57년부터 대학가에 이성교제가 자유로와지기 시작했는데 이성교제를 위해 다방출입이 잦은 학생을「금붕어」라고 불렀다. 이때「걸기대」(이성교제가 시작됐다),「시사회」(자기 애인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 「개봉박두」(약혼단계에 이름)등 영화용어와 관련된 속어가 크게 번졌는데 당시 대학생들의 주된 오락은 영화관람이었기 때문이다.

<60년대>
60년대에는 당시의 어려웠던 생활형편을 반영한 속어가 많았다.
60년에는 시간을 잘 안지키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빗댄「코리언타임」이 변형된「구공탄타임」이 유행했다. 61년에는 주름살을「인생계급장」이라고 불렀는데 어른에 대한 격하와 아울러 당시 위세를 떨치던 군대계급장에 대한 풍자의 의미도 담고있다고.
무허가건축이 성행하던 62년에는 못생긴 얼굴을「무허가건축」으로 불렀다. 막걸리와 소주를 주로 마시던 당시의 학생들은 63년 무렵에 소주에 콜라를 탄것을「소크라테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탄것을「막사이사이」라고 부르며 즐겨 마셨다.
64년에는 눈치가 무딘 사람을 가리키는「형광등」「텔리비전」이 크게 번졌다.
65년에는「허리하학」이란 말이 유행했는데 성관계를 철학용어에 빗댄것.
애인을 여럿 사귀는 것을「지점을 낸다」(66년)로 나타냈고 맥주집에 가면 혈색이 좋아진다하여 맥주집을「미장원」(67년)으로 불렀다.

<70년대>
70년대에는 대학생들의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이 억제당하자 이를 빗대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70년에「중앙집권제」(얼굴이 오목한 사람),「지방자치제」(얼굴이 넓적한 사람),「삼권분립」(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 사람),「자유방임주의」(못생긴 사람)등이 유행했고 74년에는「최루탄세대」와 술 잘하고 못하는 학생을 가름짓는「주류」(주류→주류),「비주류」란 말이 생겼다.
이성교제에 관련된 속어도 다양하게 변했다. 달에 첫발을 디딘 직후인 70년에는「궤도수정」(애인을 바꿈)이, 미니스커트가 유행한 71년에 이를「따오기」라고 불렀다.「따오기」는 동요가사「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에서 유래한것.
72년에는 피임약을 말하는「지우개」가, 76년에는 교제하는 사람은 많은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레퍼터리는 많은데 히트송이 없다」란 말이 번졌다.
또 79년에는 진실성이 없는 말의 홍수를 꼬집는「장부일언이 풍선껌」이란 말이 번졌다.

<80년대>
80년대에 들어 대학가의 속어는 물질만능풍조와 교육정책을 비꼰말이 많아졌다.
80년에 시험답안지를 일컫는「허위자백서」가 유행했고 이어「부실기업」(예쁜 딸이 없는 집안·81년),「문어발기업」(여러명의 이성을 사귀는 학생·82년),「핀치히터」(임시애인·83년)가 생겼다. 84년에는 대학가의 현실을 반영하는「총장친서」(학사경고장)와「삼고삼저」(삼고=등록금·잡혀가는 학생수·행정부권한, 삼저=학원자율·교권 지식인들의 양심)란 말이 생겨났다.
85년의 속어는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주입교육의 실태를 꼬집은 말이 대표적이다.「학력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낸 아들에게 아버지가 맛있는 것을 먹을래, 영화를 보러갈래, 선물을 사줄까하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자 아들이『문항이 4개가 아니고 3개뿐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서정범교수는『사회상과 대학생들의 생활상이 그들의 의식구조에 투영돼 생겨난 이들 속어는 시대와 사회의 기록』이라고 지적했다. <양재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