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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니스에서 본 테러와 톨레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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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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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아침에 눈을 뜨니 테러가 나 있었다. 7월 15일 프랑스 니스에서였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유명 관광지인 프롬나드 데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에서 전날 밤 차량 테러가 발생했다. 7월 14일은 ‘바스티유의 날’로 불리는 프랑스혁명 기념일이다. 테러범이 트럭을 몰고 불꽃놀이 축제에 모인 사람들을 짓밟아 80여 명이 죽고 200명 넘게 다쳤다. 등골이 오싹했다. 우리 가족은 10년 이상 살던 프랑스를 오랜만에 다시 방문해 마침 니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테러 당일엔 미술관을 구경하고 불꽃놀이를 보려 했었다. 피곤해서 도중에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바로 테러가 일어난 그 자리에 있었을지 모른다.

300명 가까운 희생자 나왔지만
24시간 특보, 이슬람 비난 없어
시민·관광객도 평소처럼 생활
테러 이기는 힘은 소통과 상식

자세한 상황이 궁금해 TV를 틀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뉴스 채널을 제외한 모든 지상파 방송이 정규 방송을 하고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라면 모든 방송이 24시간 생방송으로 특보를 내보냈을 것이다.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호텔 밖으로 나가 봤다. 바로 앞 생 라파엘 (Saint Raphael) 해변의 풍경은 신기할 정도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손자·손녀를 데리고 나온 노부부, 친구들과 함께 온 10대 청년들, 땅콩을 파는 아저씨까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여름 지중해의 따가운 햇살과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파리 북쪽에서 휴가를 온 은퇴 부부와 테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테러를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비판했지만 이슬람이나 중동과 연결 짓지는 않았다. 사흘 뒤 니스에서 유명한 리비에라(Riviera) 쇼핑몰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비가 삼엄해졌지만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만나고 쇼핑하고 있었다. 20일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파리로 이동했다. 국가비상사태 기간이지만 주요 관광지인 루브르 박물관과 콩코드 광장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으로 꽉 차 있었다. 뤽상부르 공원 안 놀이터는 프랑스어·영어·러시아어·아랍어·중국어로 떠드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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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럴까?’ 의문이 절로 들었다. 위험의 일상화나 충격 체감의 법칙이란 말이 먼저 떠올랐다. 테러의 유형과 장소가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해지면서 개인이 안전을 담보할 방법이 어차피 사라졌다. 위험을 줄이기 어렵다면 감수하고 살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해도 덤덤한 한국 사람들과 같은 심리 아닐까.

하지만 이것만은 아닌 듯했다. 여행에서 만난 많은 프랑스인이 해변에서 만난 노부부와 같은 얘기를 했다. 테러 행위를 규탄하지만 그것을 종교나 인종의 문제로 확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일상생활을 이어 갔다. 갈등과 반목, 분열과 증오를 자극하는 게 테러의 궁극적 목표라면 니스 테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테러의 책임을 ‘내부의 적’이나 ‘악의 화신’에게 돌리고, 물리적 보복을 외치는 극우 정당의 목소리가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 대세는 아닌 듯했다. 많은 프랑스인은 테러의 주체가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 극단세력 이슬람국가(IS)’이며, 궁극적 목표가 톨레랑스(tolérance)로 대표되는 프랑스 특유의 관용 정신에 균열을 내는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귀국 직전 오랜 친구인 몽세프 셰이크루후 전 파리공립경영대학원(HEC) 교수를 만났다. 그는 “많은 이가 테러의 원인으로 종교를 언급하지만 사실은 경제와 분배가 문제”라고 했다. “경제가 잘 돌아가고 그 결실이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면 테러 세력이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프랑스는 아직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기보다는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이해하는 소통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느꼈다. 톨레랑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테러 전 이슬람 친구들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슬람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특별한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난 게 7월 5일이다. 박사과정 동기이며 튀니지 이민 2세인 세미가 사는 니스 부근 중세 도시인 비오(Biot)를 방문해 그의 이웃 친구들과 라마단 종료를 기념하는 조그마한 파티를 했다. 파리 부촌에 살다가 재산을 정리하고 시골에 정착한 에마뉘엘, 시리아에서 이주한 지 이제 1년 된 라미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 자정이 넘도록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 중에는 테러에 대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테러를 이슬람 교리로 정당화하거나 옹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의 탐욕이 불평등을 유발하고 그 결과로 테러와 같은 극단적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는, 평범하지만 본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솔한 이야기가 오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보다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고, 특히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지는 않아도 안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는 건배를 했다. 프랑스의 일상이 유지되는 힘은 주류 백인이나 이민자들 모두 이런 상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러가 빈발하는 프랑스보다 사사건건 없는 갈등도 만들고 키우는 한국이 문득 더 걱정스러웠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