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어머니가 떠맡은 자녀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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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엄마, 여기는 무슨 색 칠해?』
『노랑』
『여기는?』
『또 물어? 빨강』
지난 11lf 오후 서울강남구 대치동 한 아파트상가의 미술학원. 8, 9세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놀이터 그림을 그리면서 무슨 색을 칠하는 게 좋으냐고 일일이 어머니한테 물었다.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그림을 그리는 10여명의 어린이를 돌아보는 학원 강사에게 『우리 민호 솜씨가 꽤 좋아졌지요?』『다음 번 미술대회는 어디서 열리나요?』하며 이것저것 묻던 민호 어머니는 시계를 보더니 별안간 서둘렀다.
『여태 못 끝냈어? 네 누나는 피아노 레슨이 다 끝났을 텐데. 게다가 넌 이제 태권도 학원에 갈 시간이잖아. 』
민호 대신 어머니가 그림 도구들을 잽싸게 챙겨 넣고 아들과 함께 미술학원을 나서자 이 학원의 「그림 선생님」한명숙씨(34)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대를 졸업한 뒤 서울시내 주택가를 돌아가며 11년째 미술학원에서 일해 왔다는 한씨에 따르면 『어머니가 자녀에게 무슨 색을 칠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은 보통이고 사생대회에 따라 가서 직접 그림에 손을 대는 어머니도 부지기수』라는 것.
『학교시험도 대신 치러줄 수만 있다면 발벗고 나설 어머니도 꽤 될 것』이라며 끝 모르고 마냥 달아오르는 어머니들의 교육열(?)을 놀라와 했다. 아버지는 으례 잠옷바람으로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린다거나 파출부와 집에서 기르는 새까지 그리면서도 아버지는 아예 빼놓는 아이들의 그림으로 알 수 있듯이 「있어도 없는 아버지」대신 어머니들이 「2인분의 자녀교육」을 해내느라 그렇게 열심이라는 것. 이제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은 아버지 손을 떠나 어머니가 전수(?)하는 시대가 됐다.
살림형편이 빠듯하다면서도 자녀를 예체능학원 한 두곳은 보내야 「부모노릇」 제대로 하는 줄 여기는 것 말고도 자녀교육에 대한 주부들의 관심을 실감케 하는 현장은 수없이 많다. 여성단체·사회단체·기업체 등에서 여는 자녀지도강좌마다 주부들로 초만원을 이루며 특히 입시지도라든지, 조기교육이란 제목이 붙으면 글자그대로 인산인해.
동국대 조은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육아 및 자녀교육을 「가장 즐겁고 보람있는 집안일」로 꼽는 주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상적인 기혼여성상에 대해서도 「자녀에게 훌륭한 어머니」라는 응답이 47%. 최근중앙일보가 전국의 주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우리나라 주부들의 최대관심사는 자녀교육문제임이 드러났다. 주부의 가사노동시간에 대한 외국어대 김애실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자녀 돌보기 및 자녀교육에만 쓰는 시간이 하루평균 2시간10분. 아직까지 남편이 자녀교육에 소요하는 시간을 조사한 자료는 없으나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임에는 틀림없다.
요즘 아버지들은 「바깥 일」로 바쁘고 피곤하며 늦은 귀가·출장·해외근무등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어 「주부의 자녀교육 독점」 이 당연시되고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온 집안에
「비상」 이 걸리기도 하지만 이때도 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인 형편.
한국교원대학 권이종교수는『자녀교육에 관한 국내 논문 중 어머니의 역할과 영향에 대한 것이 5백여편에 이르나 아버지의 역할을 다룬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한 사실도 자녀교육이 어머니의 일이라는 통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상 자녀교육에 문제가 생겨도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도 어머니에게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녀가 빗나간 게 어째서 어머니만의 책임이냐』 거나, 『과연 그 아버지는 자녀교육에 충분한 관심과 성의를 보였는지』를 따져보는 분위기가 아니다. 엄부자모라는 우리 전래의 교육관은 이제 차차 시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심리학자나 교육학자 및 정신과의사들은 상당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가족내에서 적절한 성역할 모델을 찾지 못한 자녀들은 자신감이 없고 나약하며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청소년 비행이라든지 동성연애 등 비정상적 이성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어머니 치마폭에서 과잉보호와 간섭 속에 자란 소위 「마마 보이」들이 늘어나 이미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권교수. 『우리나라 어린이들도 점점 의존적이고 참을성 없고 지나치게 수줍거나 난폭한 어린이들이 많아진다는 일선교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러나 자녀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자녀교육을 혼자 떠맡은 데 대해 불평하는 주부는 흔치않다. 이에 대해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낮으나 어머니는 문화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부계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 풀이하는 인류학자들도 있다.
자녀교육이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명실공히 남녀 평등한 사회구조가 되어야만 이 같은 추세에도 제동이 걸리리라는 것이다.
『어머니만 보아도 식은땀이 나고 밥을 먹을 수가 없다』고 호소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신경정신과나 청소년 상담실을 찾을 때조차 어머니를 동반하는 현상이 많다고 말하는 정동철박사 (신경정신과전문의) 는 『어머니의 관심과 간섭은 줄이고 아버지의 성의와 노력이 늘어야한다』는 처방을 내린다.
부모가 좋은 학교 가기 위한 공부가 곧 자녀교육이라는 착오를 깨닫고 아버지는 일요일만이라도 자녀와 함께 산책·등산·낚시로 여가를 즐기며 대화하는 등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최근 몇 해 사이에 선보인「아버지학교」라든지, 「참 부모가 되는 길」등의 사회교육 프로그램은 자녀교육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분위기의 반영이기도 하다.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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