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동력 잃은 정국…장외로 줄달음|서명운동 둘러싼 여야의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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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대 시위학생의 대량구속사건에 뒤이어 개헌가두서명운동에 대한 강력한 법적 제재지침이 시달되는 등 여권의 초강경 방침이 잇따라 발표되는 가운데 신민당 측은 12일 전격적으로 개헌서명운동에 착수함으로써 정국은 바야흐로 개전 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정부당국은 1백89명이라는 충격적인 숫자의 시위학생을 구속하고 일체의 개헌서명운동은「위법처리」한다는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다. 서명운동을 벌이면 학생·종교인뿐 아니라 정당원·의원도 처벌대상이 된다고 했고, 서명과 관련된 행사라면 야당내부의 행사까지도 단속대상이라는 방침도 나왔다.
야당 측에서는 서명이 국민기본권이라고 맞서고 있어 서명운동이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두고 법률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문제가 정당이나 정치인의 손을 떠나 사법의 처리대상이 되고있는 느낌이며 정치휴지기간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여당 측은 신민당과 학생·재야가 연계한 개헌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개학 전에 개헌서명운동의 추진세력을 약화시켜 버릴 뿐 아니라 신민당의 서명운동자체도 사전 봉쇄할 작정이었으나 신민당은 예고했던 20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2·12 총선 1주년인 12일 바로 서명운동에 들어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야는 기자회견을 통해 올해 정국을 전망하면서 비록 개헌문제라는 핵심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견해차를 보이긴 했지만 서로 대화할 수는 있는 듯한 여지를 보였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태가 심각한 양상으로 접어드는 기색인데도 어느 쪽에서도 아직 협상의 통로를 트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있다.
여당은 여당대로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큰 정치」홍보에 열중하고 있을 뿐 이렇다할 대야협상의 시도는 접어두고 있고 야당 또한 정부 방침에 대해 서명강행을 외치는 것밖에는 효율적인 대처방안 하나 마련 못한 채 내부문제로 골치를 싸매고 있을 뿐이다.
민정당 측은 11일 남미순방에 나선 이재형 국회의장이 돌아올 때까지는 국회문제를 거론할 계획이 없고 야당 측의 내무·문공위소집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어 정치휴지기간을 상당히 길게 잡고있는 눈치다. 신민당도 현안문제를 원내로 끌어들여 보겠다는 노력을 벌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결국 여야는 장외 대결로 치달을 가능성을 빤히 내다보면서도 권외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태를 정치권내로 끌어들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집권 측의 전략·전술을 가장 먼저 꼽아야겠지만 여당이건, 야당이건간에 어느 의미에서 책임있는 협상창구를 갖고있지 못한 점도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민정당 측은 국정연설에 이어 노태우 대표위원의 기자회견을 통해 88년까지 개헌논의유보를 제안했지만 그것을 위한 여권의 정치일정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여권내부에서도 이 제의에 대한 해석에 있어 견해들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89년 개헌 논의」가 여대표의 회견을 통해『개헌논의의 내용과 곁과에 대한 개방적 검토용의』로 조금 적극화되긴 했지만 그것에 포함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 여권의 누구도 선뜻 그 중의 어느 것을 내세우기가 어렵다는 미묘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88년까지의 개헌론의 유보는 88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한번 실현하면 현행헌법에 대한지지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전제로 한 호헌론이라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또 그것을 여권일부의 주장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면, 그 내용은 대통령직선제와 내각책임제 등 여러 선택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그 시기도 89년에서 95년까지 여러 가지 방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개헌논의의「단순한 유보」이상의 뜻이 여당 측의 제안 속에 정말 포함되어 있다면 그와 같은 장기구도를 갖고 대야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후계자문제, 권력의 승계 및 그 후의 여권내부질서 등과 관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같은 구도와의 관련하에서 야당과 협상을 벌이려면 그전에 여권 내부에서 이 문제들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의견의 일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결국 현재의 여당으로서는 본질문제에 대한 협상보다는 개헌논의유보와 임시 국회 등의 주변문제만을 협상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형편은 야당 측 또한 나을 것이 별로 없다. 김영삼씨의 신민당 입당이 당의 실세화라고 일컬어지지만 김 고문이 협상의 전권을 가진 상태는 전혀 아니다.
이재형국회의장의 출국 전에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이민우 총재에게 환송 모임 참석을 요청한 것으로 미뤄 보면 민정당 측은 김 고문을 실질적인 대화상대로 여기면서도 아직은 그 위치를 제한해 두겠다는 심산인 것 같다.
이민우 총재와의 불편한 관계, 동교동 측의 견제 속에서 김 고문이 언제 실질적으로 당권을 장악해 문자 그대로「가세화」를 이룰지는 간단히 전망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말하자면 신민당도 복잡한 내부정비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 고문 특유의 돌관형 정치스타일과당 내외의 기대와 책임, 그리고 당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해야하는 필요성 때문에도 김씨 측은 개헌서명운동을 강행함으로써 가세화의 계기를 마련하려 한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양측이 그 같은 대결을 어디까지 몰고 갈 작정인가 하는 점이다.
여권은 초반에 초강경 방침으로 기선을 제함으로써 야권과 학생·재야 움직임에 일찌감치 쐐기를 박아버리자는 생각인 것 같다. 3월말께의 임시국회와 헌법특위를 마지막 안전판으로 남겨두고 죌 수 있는 데까지 죄어 권내로 이끌어들일 작정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야당 측은 명분이 설만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지 않는 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지난 연말부터 계속돼온 여권의 강공책에 기세가 꺾인 채 밀리고 있지만 개헌서명운동의 추진방법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장외의 힘 겨루기에서 자기 쪽에 협상이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압력의 강도를 높여가자는 생각이라면 이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있는 것이라 하겠다.
문제는 민정당이나 신민당 모두 개헌논의유보라는 본질문제에 대한 협상을 벌이기에는 아직 어정쩡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장외 충돌을 눈앞에 두고도 제어력을 발휘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또 일부현상은 당의 권역 밖에서 이뤄지는 듯한 인상도 주고있다.
그러나 권외대결이 가열해질 경우 그것은 자칫 그 어느 쪽도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달러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양측 모두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형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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