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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에 오른 중국의 대국굴기와 한국의 중견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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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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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 재단 이사장

최근 시진핑 정부 들어 야심 차게 펼쳐 온 중국의 대국굴기가 도처에서 도전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중견국 외교도 함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중국, 힘과 감정으로 한국 흔들지 말고 대국의 품격과 세련된 매너 보이고
한국, 국익 원칙 아래에 종합 리더십 갖추고 중견국 외교체제 재정비해야

무엇보다도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이 국제분쟁조정기구로부터 근거 없다는 판결을 받으면서 힘에 의존한 외교력이 좌초하고 있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가 중국의 전략이익을 침해한다는 중국의 강력한 반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이번 사드 배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중견국 외교도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우선 한·중 관계가 미·중 관계의 종속변수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함으로써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민감한 사안의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리더십이 부족해 외교정책과 안보정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국내 이해 상충 문제 등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소통을 통한 갈등 관리에도 실패했다. 특히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간주해 온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불리한 판정을 받은 그 시기에 사드 배치 결정을 발표하는 등 타이밍을 선택하는 외교적 감각이나 혜안도 부족했다.

한·중 관계도 한동안 밀월관계인 듯싶더니 수시로 돌출되는 이해관계 상충에 따라 금방 냉각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서 시진핑 주석과 함께 전승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하고, 한·중 FTA가 타결됐을 때 한·중 우호 관계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 무렵 한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5위의 출자국으로 참여해 부총재국이 되고 중국은 유엔의 대북 제재에 적극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 주도의 AIIB가 홍기택 부총재 개인 신상의 문제를 빌미 삼아 한국 측 부총재 자리 자체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등 비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거친 외교적 제스처로 반발하고 있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내실화를 표방했던 한·중 관계가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과 중국 외교의 품격이 대국굴기를 할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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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석]

이렇듯 한·중 관계가 양국 간 이익의 균형, 가치의 균형이 아직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운데 미·중 간 이해관계에 따라 극심한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에 이것을 주면 한국이 저것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외교적 거래를 하는 것은 때로 허무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상호 불신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이제는 우리 외교가 원칙 없이 미·중 사이를 넘나들며 모두에 친구가 되려는 자세를 취하면 자칫 중심을 잃고 분쟁의 바다에 빠져 그들의 간여를 초래하고 기대감만 키워 줄 수 있다. 우리는 선진화된 중견국가로서 AIIB 가입, 사드 문제나 남중국해 분쟁과 같은 미·중 간의 이해충돌 사항들에 대해 철저히 국가 기본 이익을 지키는 입장에서 원칙을 정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현명하게 효과적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우리는 미·중 사이에서 과도한 전략적 모호성 속에 상황별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이 지나친 수직적 동맹 관계로 강요돼선 안 되듯이 중국의 무원칙한 보복을 두려워해 마땅히 해야 할 선택을 주저해서는 안 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단기 이익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원칙 있는 외교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견국 외교의 금도인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제 중견국가로서 종합적인 국익 계산 능력, 국민 설득 능력, 입체적인 외교역량을 점검하고 배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제 문제가 국내 문제이고 국내 문제가 국제 문제로서 항상 이해 상충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불가분의 일체로 묶어 종합 관리하는 시스템과 지휘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 각 부처·국민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긴요하고 이런 것에 기반해 중견국 외교의 새로운 체계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셋째, 중국도 이제 대국다운 풍모와 처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국이 된다는 것, 그리고 대국의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은 대국굴기를 완성해 나가는 도정에 있고, 가야 할 길도 멀고 험하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봐도 아직은 힘을 과시하기보다 힘을 길러야 할 때다. 지금 한·중 관계에서 한국이 많은 경제적 이익을 보고 있고,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에 신세를 져야 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무기화해 사사건건 한국을 압박하고 북·중 관계 카드를 수시로 만지작거리며 한국을 흔들려는 처신은 옳지 못하다. 설령 대응조치가 필요할 때라도 세계 리더국가로서 국제법과 국제규범 속에서 행동해야 하고 한반도 질서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손실, 시장경제 지위, 평판 비용 등을 고려하면서 결정해야 한다.

앞으로 중국이 대국으로서의 세련된 매너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소통해 세계와의 확대 균형을 이루는 매력 있는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사드 사태 이후 한·중 양국이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이제부터 한·중 관계가 동태적인 변화 속에서도 안정을 추구하고 확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감정과 이미지에 앞서 실사구시하며 두 나라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국가지도력은 위기 때 빛나는 것이고 해법이 없을 때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노출된 중견국 외교의 허점을 보완하고 그 기반을 튼튼히 갖추기를 바란다.

정덕구 NEAR 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