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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많이 하더라도 보람 느끼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국민으로 소문나있다.
경제기획원의 조사에서 봐도 한주일에 평균 52시간24분을 일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이쯤이면 과연 소문과 실제가 어긋나지 않음을 알수 있다. 부지런하고 일많이 한다는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생활에서는, 적어도 동양사회에서는, 자랑거리요 덕목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부지런한 덕분인지 국민의 영양 섭취량도 2천6백m칼로리에 이르렀고, 엥겔계수도 낮아졌으며(30·9) 노인인구 비율도 높아졌다. 승용차 굴리는 댓수도 87명에 1대꼴이며 전화보급·의료보험의 혜택도 크게 늘어났다.
집집마다 교양서적이 갖추어지고(53.7권)연간 11·7권의 책을 읽으며 국민의 62%는 열심히 신문을 읽는다. 그뿐 아니다. 영화관 박물관에 가는 사람도 늘었고 연극이나 음악회에 참석하는 문화인구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런 통계들만 보고있으면 과연 부지런하고 일 많이하는 보람이 절로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85년 사회지표의 또 다른 통계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 많이 하는 국민들의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답답한 자료들도 눈에 뛴다. 무엇보다도 이만큼 부지런한 근로자들의 81·8%가 자기의 장래성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뿐아니라 자기가 맡은 직무에 만족하는 사람은 34.3%, 작업환경에 대해서는 33·2%만이 만족하고 있으며 근로시간에 대해서는56%가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근로자들이 이처럼 자기일에 불안과 불만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간단히 지나칠수 없는 일이다. 한주일에 52시간 24분을 일한다면 토요일 반나절을 빼고 거의 매일 9시간36분을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일을하는 사람의 82%가까이가 장래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용의 불안정이나 임금문제 작업환경과 근로시간·근로의 내용과 연관되어있을것이다. 근로자들이 불안과 불만을 느끼면서도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시장구조와 저임금체제에 연관되어있다.
국내노동시장이 구조적으로 비탄력적이고 노동이동이 원활하지않은 상태에서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은 서로 밀접히 연관될수밖에 없다. 그단적인 예가 바로 저임지대가 밀집된 제조업분야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길다는 점이다.
제조업의 경우 하루 평균근로시간은 토요일없이 9시간이 넘는다.
이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저임금을 노동시간의 연장으로 보충하고 있다. 이점에서 보면 세계에서 제일 많이 일한다는 통계는 결코 자랑거리가 될수 없을뿐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정책으로 개선해야될 과제일뿐이다.
더더구나 이런 장시간 노동이 산업간 직종간, 또는 학력간의 더욱 벌어지기만 하는 임금격차로 인해 점점 심화되는 추세를 지나쳐서는 안된다. 사람의 일이란 원래는 자기가치의 실현이지 무엇 또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것은 아니었다.
더더구나 일을 위해 일하는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흡사 모든일이 가치있고 보람있으며 그저 각고하고 근면한 것만이 유일한 덕목으로 강조된다. 그래서 쓰는 말도 노동대신 근로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일도 건성으로 하는일이 아니라 애써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져간다. 일본의 성공이나 독일인의 근면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성공사례요 모범답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근로자들이 진정으로 일의 보람을 더 느끼게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얼른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노동의 주체적 요구와 객관적 조건이 조화되지 않는한 근로시간만으로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하다고 말하면 수사요 허구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의 장점인 풍부한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장시간 노동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원튼 원치않든 앞으로의 산업발전 방향은 기술과 효율이 함께 집약돼야할 고도산업화가 될것이다. 그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다른 어느부문보다도 근로의 작업개선이 선결과제가 되고 그것을 위해서는 임금구조·작업조건과 환경을 비롯해서 근로의 질과 연관된 모든 여건들이 하나씩 개선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사회가 근로자들에게 떳떳하게 근로의 미덕을 강조할수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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