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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엔 결혼·출산 미룬 22K세대…대학 정원 미달 본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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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홍콩인과 결혼한 이선옥(36)씨는 세 아이를 둔 전업주부다. 8년 전 홍콩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국과 별 다를 바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 집값 오름세가 이어지면서 92.4㎡(28평) 집에 들어가는 월세만 3만2000홍콩달러(약 470만원)다.

저출산 동병상련 ‘아시아 4룡’
육아휴직 등 제도는 서구와 비슷해도
일·가정 양립 잘 안 돼 출산 저조
싱가포르 2011년 인구재능부 신설
결혼·가족 패키지 정책, 출산율 안정

교육비 부담도 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첫째와 사립 유치원생인 둘째에게 매달 212만원이 들어간다. 아이 맡길 곳이 부족해 주변의 직장맘들은 외국인 베이비시터(평균 임금 61만원)를 고용한다. 이씨는 “집이 너무 작고 교육비도 비싸서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대부분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려고 하다 보니 사교육 경쟁이 한국보다 심하다”고 말했다. 홍콩의 출산율은 1.20명(지난해·잠정치)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대만·싱가포르 등에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 국가는 1980·90년대만 해도 고도성장을 하면서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렸다. 눈부신 경제 발전을 토대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 달러를 넘기며 선진국 언저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인구 구조가 변화하면서 저출산·고령화라는 동병상련을 겪고 있다. 4개국의 출산율은 지난해 기준 1.18~1.2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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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현상은 사회 문제로 번지고 있다. 대만 청년들은 ‘22K 세대’(대졸 초임 2만2000대만달러, 약 78만원)로 불린다. 결혼·출산은 후순위로 밀려 있다. 대만 영자지 차이나포스트는 지난 5월 “최고 명문대인 국립대만대를 비롯해 대다수 대학이 정원 미달 사태를 겪으면서 존폐 여부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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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치솟는 집값과 경직된 직장 문화, 과도한 사교육비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에선 결혼과 출산에 부정적인 젊은 층, 특히 미혼의 고학력 여성이 늘고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저출산이 심화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출산휴가·육아휴직 등 제도는 서구와 비슷하게 갖췄지만 성 역할 구분이 여전하고 일·가정 양립이 잘 안 돼 있는 등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신윤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가정과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지만 장시간 노동과 유연하지 못한 근로환경 등이 지속돼 자녀를 포기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현재 30대 이하는 교육 수준이 기성세대보다 높지만 거기에 걸맞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을 가능성은 훨씬 작기 때문에 출산을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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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정책은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싱가포르가 가장 앞서 있다. 싱가포르는 75년 출산율이 인구가 줄지 않는 대체율(2.1명) 밑으로 떨어지자 87년 ‘결혼·가족 패키지 정책’을 시작했고 2011년에는 컨트롤타워 역할의 ‘국가인구재능부’를 신설했다. 100여 명의 직원 중 저출산 담당만 20~30명에 달하며 주변국 사례도 적극 벤치마킹하고 있다. 사회가족개발부는 미혼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사회개발네트워크(SDN) 기관을 만들었다.

국가인구재능부 탕즈후이 정책기획과장은 “패키지 정책을 꾸준히 시행하고 컨트롤타워를 세우고 지도자들이 나선 게 결합하면서 출산율이 안정세로 돌아선 것 같다”며 “사고방식은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라 천천히 바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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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2006년 저출산 정책을 시작했지만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아직은 갖춰져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만은 별도의 부서가 없고 행정원 산하 국가발전위원회가 저출산 문제를 경제계획 등과 함께 맡고 있다. 2008년 『인구 정책 백서』를 처음으로 발간했다. 자녀 세금공제 혜택과 불임 시술 지원 등 구체적 대안을 내놓고 있다. 홍콩은 2012년 민관 합동의 ‘인구정책조정위원회’를 신설했다. 중국 본토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정책의 속도가 더딘 편이다. 홍콩 신보(信報)는 지난 5월 칼럼을 통해 “출산촉진국 등 저출산 전담 부서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4룡이 이처럼 다양한 정책적 시도를 하지만 출산율·신생아 수는 눈에 띄게 반등하지 않고 있다. 최진호 아주대 명예교수는 “이들 국가가 저출산의 덫에 걸린 상황은 향후 10~20년 내로 해결되긴 어려워 보인다. 좀 더 실효성 있는 대안을 각국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장주영·서영지·황수연·정종훈 기자, 정소영(고려대 일문4) 인턴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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