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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가 된 아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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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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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논설위원

세 치 혀는 무섭다. 나라를 구하고 남을 즐겁게도 만들지만 때론 자신의 몸을 베는 칼이 된다. 고려 때 서희 장군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해 나라를 구했다. 성공한 입의 외교다. 언변이 좋은 이들은 좌중을 주도하고, 웃음 제조기로 뜬다. 반면 세 치 혀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흉기도 된다. 한 번 잘못 뱉은 말로 치명타를 입는다. 입이 화의 시작이라는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다. 정치인들의 ‘쓰레기 발언’과 고위 공직자들의 잇따른 막말에 국민이 망연해하는 요즘, 꼭 새겨야 할 성어다.

MB 정부서 혀 꼬인 실용영어, 현 정부선 정체성 모호
EBS 지문 달달 외우게 하더니 내년엔 절대평가 전환

말의 전파력은 강하다. 앞뒤 정황과 의도, 진위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여론재판이 된다. “민중은 개·돼지”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파면당한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도 그런 예로 볼 수 있다. 본인은 억울해하지만 세 치 혀가 자신의 몸을 벤다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의 경계를 잊은 참극이다.

문뜩 ‘아륀지’ 사태가 떠올랐다. 2008년 1월 30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회의실. 인수위가 초·중·고교 영어교육을 실용 중심으로 뜯어고치겠다며 마련한 ‘영어 공교육 완성을 위한 실천방안’ 공청회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 말미에 당시 이경숙(이하 존칭 생략) 인수위원장의 아륀지 발언이 나왔다. 방청객이 “영어는 발음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데 원어민 수준의 발음을 못하는 이들을 어떻게 교사로 뽑을 예정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경숙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처음에 미국에 가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듣더군요. 그래서 아륀지라고 했더니 알아들었어요. 우리나라 발음 표기가 잘못돼서 그래요.”

아륀지가 이명박(MB) 정부의 몰입교육 상징으로 국민적 저항의 도화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경숙은 통탄의 혀 꼬부림이 부메랑이 돼 사실상 내정됐다던 총리직을 날려 버리고, 영어 교직 개방과 말하기·쓰기 강화, 원어민 교사 확대 등 실용영어 교육은 재갈이 물렸다.

엊그제 이경숙(현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더니 가슴을 쳤다. “공청회를 부드럽게 하려고 경험을 얘기한 것인데 졸지에 매국노가 되더군요. 영어 사교육비가 연간 15조원인데, 그때 공교육에 5조원만 썼어도 엄청 달라졌을 텐데 너무 마음이….” 그의 회한대로 아쉬운 점이 많다. 영어 능통자에게 교직을 개방해 영어전용교사(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 2만3000명을 확보하겠다던 계획이 제일 그렇다. 지금도 영어 수업이 가능한 영어교사가 30%도 안 되니 말이다.

아륀지 사태로 MB의 실용영어 교육은 동력을 잃었다. 영혼 없는 관료들은 좌고우면했고 ‘실용’이란 말이 혀 속에 묻혀 버렸다. 그나마 현 정부에선 원어민 교사나 방과후 교실마저 축소됐다. 대신 학생들이 EBS 수능 영어 교재의 한글 번역 지문을 달달 외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같은 보수 정권인데도 “영어를 쉽게 내라”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아륀지가 귤도 아닌 탱자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년부터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되는데 학교가 전혀 대비를 못하고 있다. 교사들을 만나보니 “죽을 쑤라는 건지, 밥을 지으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90점 이상은 1등급, 80~89점은 2등급 식의 절대평가 부작용도 걱정했다. 25년간 영어를 가르쳤다는 고교 교사는 “서울대는 수능 영어 1등급과 9등급의 점수 차이를 4점밖에 안 둬 변별력이 없다”며 “절대평가로 영어를 소홀히 하고 다른 과목엔 사교육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언컨대 수능 영어 절대평가는 그 운명을 장담하기 어렵다. ‘병아리 눈물’만큼만 바꿔도 태풍이 몰아치는 게 입시인데 정부마다 소 잡듯 하니 말이다. 정부에 따라 아륀지가 귤이 되고 탱자가 되는 기괴한 입시 난도질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세 치 혀는 위대하다. 나라도 구한다는데 교육을 왜 못 구하겠는가. 길은 하나다. 대통령부터 가슴과 마음으로만 교육을 바라보고 관료들은 권력의 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맹약을 하는 것이다. 심시교문(心是敎門) 할 큰 가슴, 큰 교육이 절실하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