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는 외면당하지 않는다|손기상<본사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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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영화계는 금년에 접어들어 하루의 영일이 없을 만큼 숨가쁜 고비를 계속 넘고있다.
연초의 영화법개정으로 시작된 이 술렁임은 지난10월 미국의 한국영화시장 개방압력으로 고조되는 듯 하더니 이번에는 외설영화 시비와 이에 따른 공륜의 공연물심의강화 방침이 보도되자 영화계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하다.
신임 공륜위원장은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사회의 물의를 빚고있는 외설영화를 비롯, 가요음반·비디오, 불법공연물은 물론 광고물의 심의(검열)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함께 전국 대도시에 공륜지부를 설치, 운영하며 여성단체의 참여와 어머니 모니터제까지 두어 이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건전풍토 조성을 위한 여러 의견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공륜의 기능과 역할을 대폭확대, 강화함으로써 그동안 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던 불건전한 대중매체의 온상을 뿌리째 뽑아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 특히 청소년들의 비행과 오염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강도 높은 규제가 자칫 대중문화의 위축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된 우리의 영화산업은 70년대부터 이미 사양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새로운 전파매체의 등장과 각종 레저산업의 개발로 인한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나마 극장을 찾는 관객의 대부분이 외화를 선호하고 국산영화를 외면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창의성의 빈곤, 영화자본의 영세성에다 소재의 선택마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영화계는 스스로의 살길을 좋게 말해서「에로티시즘의 영상화」에서 찾으려 했지만, 이것이 표현의 한계를 넘어 자극적이고 감상적으로 묘사되었다하여 이른바「벗기는 영화」로 물의를 일으키게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영화가 이처럼「변신」을 하게된 것은 따지고 보면 정부나 사회적분위기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 80년대에 들어와 모든 분야가 개방과 자유화의 물결 속에 휩쓸리게되었는데 영화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86년과 88년의 국제행사를 앞둔 마당에 우리의 문화예술은 더욱더 개방돼야 한다는 선진문화에의 지향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여기서「개방」이라고 한 것은 영화에서「옷을 벗기는」그런 의미는 물론 아니다. 예술활동에서의 표현의 자유, 소재선택의 자유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쨌든 금년에 제작된 영화중 약70%가「외설」로 규정되고 있음은 그 판단기준이야 어떻든 영화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영화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미국영화의 수입개방 일정을 87년으로 확정해 놓고있는 이 시점에서, 또 정치나 사회분야의 소재선택에 적지 않은 제약을 받고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자유롭게 제작된 미국영화와의 경쟁에서 설 곳을 잃게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 우리영화계가 안고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산영화의 질을 향상시키고,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는 일이다. 따라서 공륜의 심의강화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국산영화의 육성책이다.
문공부는 금명간 청소년의 선도와 문화의식 계발을 위해「청소년 전용극장」을 마련할 모양이다. 이 청소년 극장과 함께 국산영화 전용관을 두는 것도 국산영화진흥을 위해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문예진흥기금과 영화진흥기금에서 출자하여 전국 주요도시에 5백석 내지 l천석 미만의 아담한 전용관을 갖추고 수준 높은 국산영화를 연중무휴로 상영하면 고급관객을 유치할 뿐 아니라 스크린쿼터의 제한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매년 대종상 수상작품 같은 예술성 높은 영화는 물론 수준 높은 문화영화·기록영화 같은 것도 소화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좋은영화 만들기, 좋은영화 보기 운동이 될 것이다.
거듭 지적하지만 우리 영화계는 현재 안팎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다. 이 전환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는 당국의 애정어린 지원과 영화인들의 구각을 벗는 비장한 결의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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