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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올림픽반세기<24>김성집|활기찾는 체육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25동란의 상처가 차차 아물어가자 체육경기도 차례로 부활돼 1955년쯤엔 정상궤도에 이르게됐다.
특히 어려움속에 출전했던 헬싱키올림픽과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 기대이상의 성적을 거둬 범국민적인 스포츠 열기를 자극했다.
경기장 시설이 충분치 못해 각종 대회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1954년말엔 미군에 접수됐던 서울운동장을 다시 인수받아 전국체전을 치르게됐다.
1955년 10월엔 제36회 전국체전이 이승만대통령 80회 탄신 기념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강화도 마이산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가 릴레이로 봉송돼 메인스타디움에 점화된것도 이 대회가 시초였다.
국제대회 참가도 활발해 1955년10월엔 세계역도선수권대회(서독 뮌헨) 에 나와 유인호(밴텀급)·김창희(라이트급)·이영환 (미들헤비급) 등 4명이 출전, 유와 금이 4위, 나는 5위를 각각 차지했다.
1956년9월엔 제1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결승리그가 홍콩에서 벌어져 한국은 2승1무로 아시아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올림픽 극동지역 예선에서는 일본과 1승1패로 무승부를 이룬끝에 추첨으로 패배, 올림픽출전이 좌절됐다.
1956년은 각 경기단체별로 제16회 멜번올림픽에 대비한 예선전이 활발했고 1명의 선수라도 더 보내기 위한 다툼이 치열했다.
올림픽뿐만 아니고 큰경기엔 언제나 선수선발에 잡음이 따른다.
지난 헬싱키대회때는 체육회와 경무대가 갈등을 빚어 조병옥회장이 물러났던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번 멜번올림픽 선수선발과정에선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KOC) 의 심각한 갈등이 노출됐다.
당초 체육회는 선수정예주의 원칙에 따라 7개종목 선수 33명(육상6·역도6·복싱4·레슬링2·사격2·사이클3·농구10명)을 추천했다.
이에 대해 KOC 5인소위원회(이상백·김명학·정상희·현정주·장기영) 는 육상·복싱·레슬링에 1명씩을 늘리고 사이클에 1명을 줄인 선수 35명으로 결정했다.
KOC의 선수 인선에 대해 체육회내부에서는▲역도감독 이철승(역도연맹이사장) 을 일방적으로 김승호 (연맹부회장) 로 교체했고▲사이클에서 선수 l명을 줄이고 임원을 2명으로 늘렸으며▲농구와 육상에서 자격이 없는 선수로 2명씩을 교체했고▲권투와레슬링에서도 체육회의 의견을 무시하고 1명씩을 추가했다고 크게 반발했다.
체육회는 이같은 내용으로 항앙의서를 체출했으나 이기린체육회장은 이를 일축, 선수단 인선을 강행했다.
한편 선수단장으로는 이기붕회장이 결정됐으나 국회에서 『국회의장이 올림빅선수단 단장을 맡다니 말이 안된다. 국회의 쳬면에 관한 일이다』 는 논란이 일어 결국 이상백부단장이 단장역할을 하게됐다.
이기붕은 그 전해 (55년) 에 우리나라 첫 IOC위원으로 선임돼있었기 때문에 체육계에선 단장문제로 국회에서 벌어진 논란에 대해 스포츠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분개하기도 했다.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철승이 역도 감독으로 뽑히지 못한 것도 정치적인 이유때문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이같은 우여곡절끌에 멜번올림픽 한국선수단은 임원14명·선수35명등 49명으로 확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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