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좌·우 합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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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 이듬해, 1946년 5월에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시작된 좌우합작운동은 이 시기의 정계에 형성되어 가던 중도적 정치세력을 중심으로한 하나의 정치운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민족분단의 위기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려한 분단시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도 볼수 있다.
해방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 발족과정에서 이미 국내의 일부 보수세력이 여기에 협력하지 않았고 건준의 인민공화국 선포과정에서 좌의 분열이 어느정도 구체화하기는 했지만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3상회의결과로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정계에서의 좌우분열이 아직 격심한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고 우익세력이 반탁으로, 좌익세력이 찬탁으로 각각 그 노선을 달리함으로써 좌우의 분열과 대립은 심화일로를 치닫게 되었고 또 좌우익 세력은 찬탁운동과 반탁운동을 통해서 각각 그 세력을 결집 강화해 나갔다.
우익세력은 귀국한 임시정부계가 만든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와 이승만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동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발족시켰고 나아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결성함으로써 반탁세력을 결집해갔고 좌익측은 여운형중심의 인민당, 박헌영중심의 공산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등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찬탁세력을 통합해 갔다.
1946년 초기의 정계가 탁치문제를 두고 좌우의 분열이 심화되어 가는 한편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사회단체 선정문제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렬되었고 곧이어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착수했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심화, 통일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일부 정치세력의 남한 단독정부수립 획책등이 배경이 되어 시작된 정치운동이요,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주동이 되고 미군정측의 후원을 받아 추진되었다. 김·여 두사람은 그 민족독립운동사에서의 위치로 보아 이운동의 핵심인물이 될만한 사람들이었다.
먼저 김규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익민족주의자였지만 민족운동전선이 분열, 약화되었을 때는 번번이 전선을 연합하고 강화함으로써 민족운동의 새로운 길을 여는데 앞장서 왔다. 그는 1920년대의 민족운동전선에서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노력자회의에 참석하여 활동했고 1930년대에는 김원봉·조소앙·지청천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상해임시정부 활동이 침체한 후의 민족연합전선형성에 주동적 역활을 다했다.
한편 여운형은 국내에서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고 비밀히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중국의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및 연안에 있던 독립동맹과의 연결을 기도하여 성공했다.
곧 해방이 되자 좌우익세력을 결집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해방직후의 정계를 주도했으나 건준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을 미국측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후 그는 좌익측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의장단으로 참가했으나 뒷날 좌익 3정당의 합당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도 알수 있듯이 극좌적인 정치인은 아니었다.
극우및 극좌적 정치노선에 휩쓸리지 않고 있던 김·여 두사람이 주동한 좌우합작운동을 미군정측이 후원한 이유는 아직 깊이 규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정도 짐작될 수는 있다. 미국측은 1946년 무렵까지는 한반도문제를 모스크바 3상회의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던 것같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측이 받아들일리 없는 극우적인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김·여 두사람 중심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미국이 받아들일수 없는 극좌적인 김일수·박헌영을 배제하는 길이 된다는 정책에 따라 합작운동을 후원한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김규식·여운형 중심 좌우합작 정치운동>
여기에는 미국측이 김·여등의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김구등의 극우세력을 지지하는 경우 중도파들이 극좌세력과 합류하여 큰 세력을 이룰 가능성이 높은 반면 미국이 중도파를 지지해도 극우세력이 극좌세력과 합류할리 없다는 사실과 한반도가 공산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분단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아직 변하지 않고 있었다는 전제가 따른다.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6월14일에 김규식·원세훈·여운형·허헌등 네사람이 회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곧 좌우 양측의 교섭대표로 우익측의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 등 5명과 좌익측의 여운형·허헌·김원봉등과 신민당및 공산당대표 각 1명으로 하고 김·여 두사람을 의장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합작위원회가 발족되자 먼저 좌익쪽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임정수립을 위한 북조선 민전과의 직접회담,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처벌, 남조선정권의 인민위원회에의 양도, 입법기관 창설의 반대등 합작조건 5원칙을 제시했다.
이에대해 우익측에서도 곧 합작조건 8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에 의한 임정수립,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촉구, 신탁통치문제의 임정수립후 처리, 임정수립후의 전국국민대표회소집과 정식정부 수립, 정치·경제·교육등의 균등사회건설, 임정수립후 특별법정에 의한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벌등이었다.
해방직후의 정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현안문제는 신탁통치 문제와 토지개혁 문제, 그리고 친일파 처벌문제였다 좌익측은 3상회의결정 지지파 지탁,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과 친일파의 즉시 처벌을 합작조건으로 내어놓은데 반해서 우익측의 8원칙은 탁치 문제와 친일파 처벌문제를 임정수립후로 미루었고 토지개혁 문제도 임정수립후 균등사회 건설방향으로 처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차이가 큰 좌우익의 합작조건을 제시받은 좌우합작위원회는 곧 스스로의 합작조건 7원칙을 내어놓았다. 그것은 3상회의 결정에 의한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의 민주주의 임정수립, 미소공동위원회속개 요청의 공동성명 발표, 토지의 몰수·유조건몰수·체감매상과 무상분여에 의한 토지개혁과 중요산업국유화, 합작위원회의 제안에 의한 입법기구에서의 친일파 처벌 등을 중요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합작위원회측의 7원칙은 좌익측안과 우익측안을 절충한 것으로서 탁치문제는 3상회의 결정지지와 임정수립을 앞세움으로써 다소 얼버무린 방안이었다고 할수 있으며 토지개혁문제도 좌우익의 생각을 절충한 방법이었고 친일파 처벌문제는 합작위원회 자체가 입법기구를 만들어 처리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좌우합작위원회가 내어놓은 7원칙에 대해 우익측 이승만중심의 독립촉성국민회는 3상회의를 지지하여 찬탁을 종용함으로써 민족진영을 분열시킨다 하고 합작의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 매도했다. 또한 한민당은 유상매수하여 무상분여하는 토지개혁 방법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라 하고 반대했다가 국가재정을 위한다면 무상몰수를 주장할 용기는 없는가라는 합작위원회측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같은 우익쪽이라도 김구와 한독당은 합작위의 7원칙을 『민족적 양심과 민족적 열의로 보아 8·15이후 최대의 수확』이라고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민족진영 분열들어 반역집단으로 매도>
한편 공산당의 박헌영은 합작위 7원칙에 대해 『마치 좌우 양익에서 제시된 5원칙과 8원칙의 극좌·극우를 극복하고 양방의 주장을 절충하여 안출한 중간노선인것 같은 환상을 일으킬수 있다』하고 첫째 3상회의결정, 토지개혁, 친일과·민족반역자문제 등에 있어서 그 주장이 철저하지 못하여 회피의 길을 준비하고 있으며 특히 그 토지개혁안은 지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긴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 따라서 그것이 우익을 토대로하고 「반동세력」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는 점, 입법기구의 창설로 군정을 개선할수 있는듯한 환상을 일으켜 좌우합작으므로 통일을 가장하려 했다는 점등을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와같은 좌우익으로부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작운동의 지지기반도 형성되어 갔다. 먼저 좌우합작운동에 반대한 한민당에서는 원세훈·송남헌등 중앙위원 16명이 탈당하여 좌우합작운동에 가담했고 뒤이어 김약수·김병로·이순택등의 핵심당원 2백70여명도 탈당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민주동맹은 합작운동에 합류했다.
좌익측은 합작위원회 7원칙이 발표될 무렵 공산당과 인민당·신민당의 강경파들이 탈당하여 남로당을 결성했는데 합당에 반대한 공산당의 비간부파 강진등과 인민당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합당반대파, 신민당의 백남운등이 뒷날 결성한 사회노동당도 처음에는 합작운동을 지지했다. 이밖에도 유동설이 위원장이던 신진당, 여운형·백남운 중심의 근로인민당, 홍명희 중심의 민주통일당, 이극노 중심의 민주주의 독립전선, 김규식 중심의 민족자주연맹 등의 중간세력 정치단체가 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미군정측의 통계에 의하면 이시기 남한에서의 정치세력 중 중간우파와 중간파 및 중간좌파를 합해 33개 정당·단체에 회원수 1천1백51만9천명이었는데 비해 우익정당 단체는 44개에 회원수 1천2백48만3천명, 좌익은 민전산하 정당·단체 41개에 회원수 1천4백45만명이었다 한다. 전체적 회원수 통계에 문제가 있지만 일단 비율면에 있어서는 중간세력이 그다지 열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 남북을 통한 합작을 목적으로 출발했던 합작운동은 합작위 7원칙이 발표된후 그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좌익측이 7원칙에 의한 합작에 반대함으로써 북한쪽이 합작대상에서 실체로 제외되었고 남한에서도 남로당 성립에 참가한 극좌적인 세력은 합작운동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우익측의 경우도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이 이 운동에서 이탈했고 김구의 한독당도 1947년에 들어가서는 좌우합작을 지지하지만 미군정의 뒷받침을 받는 합작위원회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세력 정치단체|합작운동 적극지지>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남한안에서도 극좌적·극우적 정치세력이 이탈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의 우파와 우익의 좌파적 정치세력이 중심되어 미군정의 후원을 받으면서 추진되었고 그 정치적 기반을 넓히기 위해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을 구성했다. 그러나 합작위원회 및 미군정의 의도와는 달리 입법의원은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이 우세하여 신탁통치반대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 5월에 미소공위가 재개됨으로써 합작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극노·신숙·김시현등 각계인사 17명을 합작위원으로 보강하여 그 지지기반을 넓혀간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또 합작운동의 주역의 한사람이던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큰 타격을 받은 위에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문제를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세력이 절대 우세한 유엔으로 이관함으로써 단정수립의 길이 실제로 열리게 되었고 좌우합작운동은 그 설땅을 잃었다.
따라서 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성립된지 약 1년5개월만에 해체되었다. 좌우합작 운동은 좌우의 분열이 심화하고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갈때 그것을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려 노력한 운동으로 출발했다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민족분단을 방지하려는 이 민족운동은 곧 남북협상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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