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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레시피 고집, 묵직하고 깊은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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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호 28면

점심 코스 요리 중 나오는 라비올리. 정통 레시피대로 복잡한 과정과 오랜 시간을 들여 요리했음이 절로 느껴진다.

“맛이 꽉 차 있다”는 표현이 있다. 풍부하고 깊이 있는 맛이 나는 음식을 얘기할 때 쓰는 말이다. 한두 가지 맛에 치우쳐 있기보다는 여러 가지 맛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면서 미각을 골고루 즐겁게 해주는 음식을 만나면 이런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고급스러운 맛이다.


이런 음식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재료를 사용해서 복잡한 단계의 조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료 각각의 맛을 뽑아내고 농축한 다음에 잘 조합하는 과정이다. 요리사의 기술은 물론이고 정성과 시간이 필수 조건이다. 조리하는 사람은 힘들고 복잡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고급스러운 맛이 만들어진다. 조미료나 몇 가지 잔기술에 의지해서 쉽게 만들어 내는 음식과는 비교가 안 된다. 누가 그렇게 섬세하게 구별할까 싶겠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그 맛을 인정하고 감사해 한다.


SNS 상에서 레스토랑을 한 곳 알게 되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내로라 하는 까칠한 미식가들이 ‘친구’를 맺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찾아가 봤다. 코스 요리를 시켰는데 첫 번째 요리가 나왔을 때 바로 알았다. 오랜만에 아주 멋진 요리를 맛보게 되리라는 것을. 바로, ‘맛이 꽉 찬 음식’을 하는 곳이었다. 경복궁 옆에 있는 ‘서촌김씨’라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다.


코스로 구성된 요리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맛이 깊고 풍부했다. 정성스럽게,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조리한 것이 절로 느껴졌다. 멋진 플레이팅도 눈을 즐겁게 해줬다. 횡재를 한 기분으로 즐겁고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김도형(40) 오너셰프와 인사를 나눴다. 이 정도 내공이면 외국의 어느 유명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라도 트레이닝을 받은 분이 아닐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순수 국내파였다. 그것도 다른 셰프들 보다 훨씬 늦게 요리를 시작한 늦깎이였다.


김 셰프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국내 최고의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해 마케팅 업무를 하던 ‘멀쩡한’ 직장인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가져왔던 요리에 대한 꿈을 잊지 못하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요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도 흔쾌히 지원해 주신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요리 학교에 입학해 이탈리아 요리를 처음 배우게 되었고 그때부터 계속 이탈리아 요리가 전공이 되었다. 여러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하고 외식업체에서 메뉴 개발 팀장도 하면서 10년이 넘도록 경험을 쌓다가 마침내 자신만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서촌김씨’를 오픈 한 것이 2016년 3월이다.

▶서촌김씨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58-2 전화 02-730-7787 12석 밖에 안되는 작은 규모여서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당일 예약은 안 된다. 점심은 코스 요리(4만9000원부터)를 하고 저녁에는 단품 요리(9000원부터)를 한다. 점심 코스 요리를 적극 추천한다. 김 셰프의 실력도 즐길 수 있고 이른바 ‘가성비’ 최고다. 무려 7가지 코스 요리가 이 가격이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이 레스토랑이 미식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김 셰프의 고집이 만들어 내는 묵직하고 깊은 맛 때문이다. 모든 음식을 이탈리아 정통 레시피 그대로 지키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부 재료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재료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조리법은 요리책에서 배운 그대로를 고집했다.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통을 따르는 것이 그 나라 음식의 기본이고, 자신이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스 요리 중에 나오는 라비올리(Ravioli) 요리를 보면 그 특징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달랑 라비올리 두 개가 나오는 요리지만 그 준비과정은 대단했다. 직접 반죽한 생면으로 라비올리 형태를 빚은 다음, 10시간 이상 조리해서 만든 이베리코 돼지고기 라구 소스(손으로 다진 돼지고기를 와인·토마토와 함께 서서히 졸여 만든 것)와 역시 오래 조리한 여러 가지 치즈 소스를 속에 채워 넣었다. 끼얹은 스프는 12가지 채소를 얇게 잘라서 구운 다음에 끓여 만든 야채 스톡이고, 마무리로 비트와 샐러리로 만든 퓌레를 곁들였다. 부드러운 라비올리 피, 진하고 독특한 맛이 나는 속, 감칠맛이 농축된 채소 국물 그리고 여기에 상큼한 퓌레의 맛이 더해지면서 양은 적지만 그 맛의 울림은 미식가들도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풍성하고 깊은 요리가 되었다.


“좋은 음식이란 신선한 재료, 깨끗한 환경, 좋은 마음가짐과 정성이다.” ‘서촌김씨’의 메뉴판 맨 앞에 써 있는 문구다. 김 셰프가 만들었다. 바로 요리의 기본이다. 기본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정통을 지킨다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쉽게, 편하게 갈수 있는 길이 계속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 셰프는 우직하게 어렵고 힘든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을 응원한다. 지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완주하기를 바라면서. ●


주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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