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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이야기] 고통은 가깝고 藥은 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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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졸로푸트란 약이 있다. 프로작과 더불어 오늘날 가장 많이 처방하는 우울증 치료제 중 하나다. 뇌 속에서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의 농도를 높여 매사에 슬프고 무기력한 사람을 행복하고 활기있게 만들어준다.

서구에선 '해피메이커'란 애칭으로 널리 통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우울증으로 졸로푸트를 복용하던 사람들에게 사정(射精)이 지연되는 부작용이 관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부작용이지 조루에 시달리는 남성들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삽입하자마자 1분 이내에 사정을 하는 조루 환자에게 성관계 몇시간 전 졸로푸트를 투여하면 10분 정도 사정이 늦춰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사정 억제 효과가 밝혀진 졸로푸트 등 서너 종류의 우울증 치료제에 대해 승인을 거부하고 있다. 단지 조루를 위해 정신병 약을 먹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졸로푸트 등 약물은 부작용이 있다. 40%의 남성에게서 성욕 자체가 감퇴할 수 있으며 약물복용 후 몇시간 동안 마치 안개가 낀 듯 의식이 흐려지기도 한다.

쎄레브렉스란 약도 있다. 최근 개발된 관절염 치료제다. 아스피린과 달리 속쓰림 부작용이 적은 것이 장점이다. 최근 미국에선 폐암 등 암환자들에게 쎄레브렉스를 투여한 결과 치료 성적이 월등히 향상됐다는 보고들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뉴욕 프레스바이테리언 병원의 연구를 보자. 이들은 수술이 불가능한 폐암 환자 26명을 대상으로 기존 항암제 치료와 병행해 쎄레브렉스를 투여했다.

이 중 5명에게서 암 덩어리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결과가 관찰됐다. 19%의 확률이다. 이는 통상 항암제 치료로 기대되는 5%보다 훨씬 좋은 성적이다. 미국에선 폐암뿐 아니라 대장암과 췌장암 등 다른 암에서도 쎄레브렉스를 투여하는 임상실험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FDA는 아직 암환자에 대해 쎄레브렉스의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이들 임상시험의 결과가 표본 숫자가 적으므로 신뢰하기 어렵고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FDA는 약물에 대한 최종 유권해석을 내리는 기관답게 신중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수천억원의 개발비용이 들어간 신약도 부작용 때문에 퇴출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러한 FDA의 태도가 마냥 옳은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을 달리 한다.

졸로푸트로 다시 돌아가 보자. 졸로푸트 등 해피메이커는 수년 동안 매일 복용해도 대부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비교적 안전한 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편과 불화로 우울증에 시달린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아들의 교통사고로 우울증에 빠진 티퍼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부인 등 지난 20여년 동안 수억명이 해피메이커를 복용해 왔다.

반면 부작용과 비용 등 약간의 희생은 얼마든지 감수하고 자신의 조루를 치료해보겠다는 남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누가 과연 졸로푸트 처방을 말릴 권한이 있단 말인가. 실제 졸로푸트 등으로 성적 자신감을 되찾고 약을 끊은 후에도 조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람이 많다.

쎄레브렉스도 마찬가지다. 이 약은 부작용 면에서 아스피린보다 훨씬 안전하다. 지금도 수천만명의 관절염 환자가 복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약이 무효인 말기 암환자들이 단지 19%의 확률만이라도 효험을 보기 위해 이 약을 먹는 것에 대해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설령 수년 후 효과가 있는 것이 최종 확인돼 FDA가 공인하더라도 내가 죽은 다음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약에 대한 처방권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FDA 승인 여부에 관계없이 의사에게 있다. 관대한 의사는 조루환자에게 졸로푸트를, 암환자에게 쎄레브렉스를 처방하는 반면 엄격한 의사는 FDA가 공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자는 약에 대한 최종 선택권이 환자에게 있다고 믿는다. 의사는 단지 환자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줄 뿐이다. 환자는 약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 오판이 아니라면 의사는 환자의 선택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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